죽음이 삶을 가르쳐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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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이 갔다. 정말 허무하게, 갑자기 가버렸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 한둘이겠느냐마는, 정말 정말 그렇게 가버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가버려서 그런 모양이다. 며칠째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신해철의 노래나 방송에서 하는 말들을 보면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굿바이 얄리’에서 병아리의 죽음도 그렇고, (사실 6살 정도에 키우다 죽은 병아리를 다 커서까지 기억하고 추모곡을 만드는 일도 참 여간한 것은 아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가족에게 남기는 유언, 유작이 되어 버린 노래 ‘민물장어의 꿈’에서도 죽음은 종종 언급된다. 얼핏 듣기로는 매우 염세적인 성향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성향이 자연히 없어졌다고 했다. 신해철은 굿바이 얄리에서 병아리의 죽음을 보며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했다.

사실 염세성으로 보자면 나도 그런 성향이 적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사다난했던 어린시절, 성인시절을 거치면서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된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은, 고등학교 시절 감옥보다 답답했던 집에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음에도 ‘돈도 없고 무서워서’ 가출을 감행하지 못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편하게(?) 누군가가 날 해치워줬으면 했다. 인도를 걷다가 차가 갑자기 달려들어 날 저 멀리로 보내주면 참 고마울 텐데..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은 신해철이 그랬듯 아이를 둘이나 낳고 난 다음부터이다. 내가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아왔다 한들, 아무 죄 없는 아이들에게 엄마 없음이라는 결핍을 경험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죽을 병이라도 들어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는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토록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바위처럼 느껴졌다. 아무 흔적 없이, 왔다 간 줄도 모르게 훌쩍 떠나야 하는데 이 세상에 내 분신을 둘이나 빼놓고 말았으니..조용히 가기는 이미 틀렸을뿐더러 세상에 미련을 갖지 않기도 어렵게 됐다. 아이를 낳음으로 인해 내 목숨은 더이상 내것이 아니게 된, 버겁고 벅찬 진실.

그랬는데, 사실 삶에 어떤 애착이 생겼다기보다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갑자기 사라지지는 말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이번에 신해철의 죽음을 보며 그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갑자기, 정말 느닷없이 남편을 잃은 아내..아빠를 잃은 아이들..아들을 잃은 부모..누구보다도 단란하고 행복했던 가정이 그렇게 시시각각 파괴되는 것을 보고 말았다. 다들 아무 준비없이 서 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죽음이 사정없이 그 가족을 몰아댔고 가정은, 가족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에 내 분신을 둘이나 만들어놓은 이상 내 죽음이 누군가의 삶에 아주 약간의 흠집 정도는 낼 수 있으리라. 그 흠집이 치유 가능한 작은 균열로 그칠지 아니면 원상복구가 불가능한 파괴가 되어버릴지는 아마도 생전의 내 노력에 좌우되지 않을까. 함께 하는 동안 더 많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겠다. 그게 남은 이들의 붕괴를 그나마 막아 주는 최선의 예방이 되리라 생각한다.

신해철은 병아리의 죽음에서 죽음을 배웠고, 나는 신해철의 죽음에서 삶을 배우고 있다.

그 어떤 격언도, 고결한 스님의 말씀도 주지 못했던 깨달음을 이렇게 얻게 된다. 며칠째 밤늦도록 아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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