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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을 한 IS를 보며, 실명공시제를 되돌아본다

강병국 프로필 사진 강병국 2015년 11월 23일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경향신문 기자와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노조활동이 계기가 되어 뒤늦게 법률을 공부했다. 원래 관심사는 문학이었지만 직업생활을 하면서 언론과 노동 등으로 관심분야가 넓어졌다. 의무를 다하는 것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파리 동시다발 테러로 세계를 미증유의 공포로 몰아넣은 이슬람국가(IS)의 상징은 복면이라고 생각한다. 선전 동영상을 통해 자신들이 테러의 주범이라고 공표하지만 정작 그 누구도 얼굴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범죄와 부정은 익명에 기댄다. 실명과 신분을 드러내 놓고 하는 양심범과 확신범은 그 예외에 속한다. 범죄를 예방하고,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려면 실명공시제의 확산이 그 지름길이다.


판사는 판결로 말하고,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한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 작가들 중 예명이나 아호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예명이나 아호로도 신원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실명과 동일시 할 수 있다. 판사와 검사, 작가와 기자에게 실명공시제를 적용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에 무한 책임을 지워 사회적 신뢰를 얻으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을 때였다. 수습기간 중에 쓴 기사의 대부분은 데스크에 의하여 손질되어 익명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서너달이 지났을 무렵 처음 기명기사가 게재되었다. 그 날의 감격은 대단했다. 신문에 나의 이름이 실린 것이 희한했고, 그것도 기사를 쓴 필자로 소개된 것이니 그 뿌듯함은 상당했다.


대체로 사회적 신뢰가 요구되는 분야에는 실명공시제가 도입되어 있는 듯하다. 신문 등의 언론이 제4부로 지칭되고 민주정치의 초석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언론이 입법ㆍ행정ㆍ사법의 3부와는 달리 경쟁체제라는 점 외에 실명공시제가 폭넓게 실천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분점하는 3부는 본질이 독점제인데 비해 언론은 다수의 매체가 각축하는 경쟁체제이고, 아울러 발화자나 글쓴이의 신원이 공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한번 기명칼럼이나 기명기사가 보도되면 검색엔진에 의하여 수 십년 후에도 검색될 운명이어서 허튼 소리를 하기 어려운게 정상이다. 탁상공론이나 곡학아세식 주장은 추후 역사적 낙인으로 귀결될 수 있다.


부당거래를 없애고, 범죄와 부정이 깃들 공간을 없애려면 실명공시제의 적용 분야를 계속 넓혀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융실명제에 이어 부동산실명제가 도입된 것이 우리 경제의 후진성 탈피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없이 조세정의가 실현될 수 없고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기대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몇 해전 대청댐을 방문했을 때 그 전망대의 현판에는 대청댐 시공자와 설계자, 감리자, 현장기술자 등의 명단이 적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은 댐과 도로 항만 교량 등은 물론이고 하수처리시설, 우수관로 등 웬만한 건조물까지 익숙한 풍경이다. 공공건물이나 대규모 구조물에는 공사실명제가 정착되어 있다. 기억에는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후 건설업법을 고쳐 준공표지판에 설계자, 감리자 등의 명단 표기를 의무화했다. 아직 주택 등의 소형 건축물에는 실명제가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 있지만 공사실명제 도입 후 부실공사가 크게 줄어든 것은 틀림없다.


한때 정책실명제를 실시한다는 홍보는 요란했지만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보행자 우측통행이나 도로명주소 도입은 누가 입안한 것인지 알려진 바 없다. 별달리 유익한 줄은 모르겠고, 오히려 불편이 많은 위 정책들은 그 입안자가 실명으로 공시될 것이 예정되었더라면 검토 단계에서 없었던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책실명제는 공직자가 목숨을 걸고 확신할 수 있는 정책만을 추진하도록 만드는 정책의 안전판, 책임 행정의 보루가 될 수 있다. 그로써 나라살림이 알뜰하게 꾸려지고 허투루 쓰이는 예산이 없게 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도대체 수명주기가 2~3년도 되지 않는 대학입시정책은 누가 만드는가? 입시제도 변경시 그 일에 관여한 사무관부터 과장 국장 장관 등의 계선 라인을 모두 실명으로 밝혀야 한다.


물론 모든 분야에 실명제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익명의 기부는 아름답다. 내부고발도 익명이 자연스럽다. 용감한 실명의 내부고발자는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그것을 요구할 염치는 없다. 정부나 권력자에 대한 비판을 반드시 실명으로 하라고 할 수도 없다. 익명의 표현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아울러 언론사가 권력자의 비리를 폭로하는 보도를 할 때 기명기사의 형식 대신 ‘특별취재반’과 같은 바이라인(Byline)을 사용하는 것도 용인되어야 한다. 이는 특정 기자가 탄압을 받는 것을 피하고 그 언론사의 기자들 전체가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읽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독재자를 칭송하는 용비어천가식 기사를 게재하면서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거나 필자를 숨기기 위해 ‘특별취재반’을 운운한 것은 언론의 본분을 망각한 꼼수로서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위와같이 익명이 필요한 분야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명공시제의 확산이 문명사회의 지향점이다. 더구나 21세기의 시대정신은 개방과 공개, 참여가 아닌가. 세상의 모든 음모와 비밀공작, 테러와 범죄는 익명의 요람에서 익명의 기획에 의해 태어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명으로 반문명적, 반인륜적 범죄를 기도할 자는 드물다. 이슬람국가가 선전 동영상에서 자신들이 테러의 주범임을 밝히면서도 복면을 쓰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익명과 복면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