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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투사 최정순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

김종철 프로필 사진 김종철 2015년 04월 06일

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지난 4월 3일 서울 제일교회에서 ‘민청학련 4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1974년 4월 3일에 민청학련을 공식적으로 ‘창립’해준 것은 바로 박정희 정권이었다. 바로 그날 중앙정보부장 신직수가 ‘국가변란을 기도하는 청년학생 조직’을 적발해 240여명을 수사하고 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문과 구타로 날조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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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에는 ‘역전의 용사들’이 모였다.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이현배, 이철, 유인태를 비롯해서 옥살이를 함께한 동지들이 한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날 모임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가슴 아팠던 회고담의 주인공은 최정순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이화여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한 그는 재야운동권에 ‘여장부’로 알려진 민주투사였다. 최정순은 동아투위의 두 선배가 경영하던 출판사 예조각에서 근무한 인연 때문에 우리와 40년 가까이 가깝게 지내왔다.


기념식에서 마이크를 잡은 그는 “민주화운동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남편과 살며 겪은 울화통 터지는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전두환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4년에 한 청년(여기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겠음)과 결혼했다. 그는 전주고등학교에서 언제나 2등보다 훨씬 앞서가던 수재로서, 그런 사람들이 주로 가는 법대나 상대를 마다하고 서울대 인문대 철학과에 들어갔다. 결혼 이전에 이미 옥살이 경력이 있던 두 사람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헌신의 각오’를 확인한 뒤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최정순 부부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수렁에 빠지게 된 것은 1985년 9월 초순이었다. 당시 재야운동권의 젊은 지도자이던 김근태(민청련 의장)를 ‘용공좌경분자들의 수괴’로 몰아 구속한 전두환 정권의 정보수사기관은 같은 단체에서 일하던 최정순의 남편을 납치하다시피 연행해 구속했다.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겪은 온갖 고문은 그 자신의 책과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결국 김근태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에 걸려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공분실의 인간백정들은 김근태의 ‘용공좌경’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최정순의 남편에게 온갖 고문을 가하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정신이 피폐해진 그는 결국 정보기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정신병원에 갇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다. 전두환 정권을 향해 아무리 항의하고 호소해도 남편을 풀어주지 않자 만삭의 최정순은 김수환 추기경의 집무실에 누워 남편을 죽음의 수렁에서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김 추기경이 어떻게 애를 썼는지, 남편은 인사불성 상태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최정순의 고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편의 고문 후유증은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에 무려 19 차례나 정신과병원에 가야 했다. 그럴 때마다 최정순의 시댁과 친정은 물론이고 친구들과 운동권 동지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런 상황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자 아들과 딸도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엄마 자신이 견딜 수 없어 이혼을 결심하기까지 했다.


나치독일의 아우슈비츠수용소 못지않은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최정순은 대형출판사의 전무가 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남편의 상태가 호전되면 잠깐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병이 재발하면 그는 직장을 박차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지금부터 4년 전 직장에서 퇴직한 최정순은 남편의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귀농했다. 공기 좋고 물이 맑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남편에게 건강을 되찾아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환경에서, 발달된 의약 덕분인지 남편의 상태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는 주역은 물론이고 신구약성서를 비롯한 경전들을 깊이 연구하며 언젠가 방대한 저술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지난 3월 24일 열린 민주주의국민행동 발기인대회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최정순과 함께 온 남편을 만났다. 뒷풀이 자리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눈빛으로 선배·동지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민청학련 41주년 기념식에서 최정순의 회고담을 듣기 전까지 나는 사생결단이나 다름없는 그 부부의 사연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최정순의 이야기는 주어진 시간 15분을 넘어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듣는 이들은 눈물을 참다못해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닦곤 했다.


나는 연단에서 내려온 최정순의 손을 잡고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다가 겨우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남편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말은 지난 수십년 동안 수도 없이 들었지만 오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백배나 힘들게 살았군.”


민주투사 최정순은 그 어떤 뛰어난 작가도 써낼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의 주인공이다. 이제 조금 여유를 찾은 그는 민주주의국민행동 공동대표단에 합류했다. 그의 굳센 투지와 따뜻한 사랑이 제2의 민주화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