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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횃불’ 옥중의 박래군을 생각하며

김종철 프로필 사진 김종철 2015년 09월 03일

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그가 진정한 리얼리즘 소설 쓸 날을 기다린다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겸 ‘4·16연대’ 상임위원)은 지금 서울구치소의 1.5평이 채 안 되는 독방에 갇혀 있다. 그는 세월호 참사 500일이 되는 지난 8월 28일 <한겨레> 토요판에 시민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올렸다. 잔잔한 필치로 쓴 그 장문의 편지를 읽으면서 솟구치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누우면 팔 하나 정도가 남지요. 바로 그 위에 변기와 수도꼭지 하나만 있는 매우 비좁은 화장실이 있어요. 아내에게 쓰는 편지에 (방이) 우리 집 화장실만하다고 썼더니 그걸 보고 울었대요. 그렇게 비좁은 공간에서 답답해서 어떻게 사냐고 걱정이더군요. 하지만 이곳에 종이 상자 깔아서 책상도 만들어 책도 보고 편지도 쓰고요. 거기서 밥도 먹지요. 화장실은 청결해야 해요. 거기서 샤워도 하지만 설거지도 하거든요.



그 어떤 사람도 ‘타고난 감옥 체질’일 수는 없다. 특히 이부자리도 제대로 펼 수 없는 독방에 갇힌 사람은 박래군의 표현대로 ‘절대고독’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오죽하면 감방으로 스며들어온 새끼 귀뚜라미가 그토록 반가웠을까?


박래군은 세월호 참사 500일이 되기 며칠 전 꿈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29년 전인 1986년 그가 ‘하나은행 점거 사건’으로 첫 옥살이를 하던 때 영등포구치소로 면회를 온 아버지는 “래군아, 골병든다. 반성문이라도 쓰고 빨리 나오라”며 눈물을 흘렸다. 경기도 화성에서 머슴살이부터 시작해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겨울이면 ‘구루마’를 끌고 장바닥을 누비던 아버지에게 래군은 가문의 자랑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명문’이라고 불리는 연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래군의 부모는 장남이 ‘혁명가’처럼 학생운동권과 노동현장을 누비던 때 청천벽력 같은 비극을 겪게 된다. 래군의 아우인 래전(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 1988년 6월 4일 학생회관 5층 옥상에서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 자결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열사’로 불리게 된 박래전은 전두환과 함께 ‘광주 학살’을 저지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공안통치’를 자행하는 데 항의하면서 온몸에 불길이 번지는데도 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다. “광주는 살아 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그는 부모에게 이런 유서를 남겼다.




절대로, 절대로 저의 죽음을 비관하지 마세요. (···) 어떻게든 살아서 아들과 함께 싸우는 이 땅의 어머님, 아버님이 되세요. 절대로 목숨을 버리시면 안 됩니다. 어머님, 아버님, 모질게 먹은 마음이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아요. 어머님, 아버님, 안녕히. 6월 2일 불효자 막내 드림.



박래전은 다른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이제 나는 이 세계를 버리려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는 안 되기에 나의 죽음이 마지막 죽음이길 바란다. (···) 피눈물로,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일어나라! 백만학도여! 나의 죽음을, 선배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아우 래전의 ‘순국’을 계기로 박래군은 오히려 극렬한 투쟁보다는 공개적 조직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이루고 인권을 살리는 방향으로 삶의 양식을 바꾸게 된다. 그는 1988년 가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사무국장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인권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이후 27년 동안 박래군은 ‘인권운동가’ ‘인권지킴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 스스로 “밭에서 농사를 짓다 금방 나온 사람”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박래군의 얼굴은 언제나 소박하고 인정 많고 겸허해 보인다.


박래군은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유가협에서 활동하면서 무려 50여명의 ‘열사’ 장례식을 치렀다. 노태우 정권과 독점자본이 그렇게 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그는 1991년 ‘열사 정국’ 때는 두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영안실을 지켰다.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집회 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사건을 비롯해서 전남대생 박승희(4월 29일), 안동대생 김영균(5월 1일), 경원대생 천세용(5월 3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5월 8일), 전남대생 윤용하(5월 10일) 등이 분신 또는 투신으로 민주화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그 열사들의 영안실을 모두 지키다 보니 박래군에게는 ‘재야의 장의사’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보통 운동가나 활동가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27년 동안 박래군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공권력의 폭압이나 자본가들의 탐욕 때문에 희생이나 고난을 당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빠짐없이 찾아가서 아픔을 함께하면서 투쟁의 최일선에 나섰다. 1991년 노태우 정권과 보수언론이 합세해서 조작한 ‘강기훈의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 진상 규명, 2002년 에바다 농아학교 재단 비리 항의투쟁에 앞장선 그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아 희생자 6명의 빈소를 반년이나 지키다가 구속되었다.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도 어김없이 박래군이 가세했다. 기독교적 표현을 빌리면,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어디에서나 함께하는, ‘遍在(편재)’하는 인물이다.


미흡하나마 ‘민주체제’라고 불리던 김대중 정권 시기에 박래군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3국장으로 8개월 동안 일했는데, 그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직생활이었다. 그는 그 자리를 떠난 뒤 인권운동의 현장으로 돌아갔다. 김대중 정권을 합법적으로 계승한 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박래군은 권력의 횡포와 강압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대추리’와 ‘강정’이 그 현장이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실상을 이렇게 밝혔다.




노무현 정부도 탈권위를 지향하면서 자유권의 신장은 많이 됐는데 농민,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투쟁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짓밟았어요. 평택에 미군기지를 만든다면서 그곳을 간척한 농민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가짜 주민총회를 만들어서 강정 해군기지를 만든 것도 노무현 정부거든요.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 모두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빈부격차는 더 심화되고 자살자도 늘어났어요. 그 토대를 이명박 정부가 올라탄 거고요.



박근혜 정권이 무능과 독선 또는 어떤 ‘이유’ 때문에 빚어낸 최악의 참사는 2014년 4월의 ‘세월호 침몰’과 304명의 인명 희생이었다. 박래군은 참사 직후부터 사건 현장인 팽목항과 안산 분향소, 광화문 농성장을 오가며 유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아픔을 달래고 그 ‘의문 투성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 자식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고 싶다는, 진상을 규명하고 세월호를 인양해 달라는 유가족과 피해자들 앞에 돈을 흔들어대며 모욕을 일삼았던 정부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분노했습니다. 삭발한 유가족들, 상복 입고 아이의 영정 들고 행진에 나선 그들과 손잡고 잘못된 정부 정책, 방침에 항의해 싸웠던 지난 4월, 우리의 힘이 부족해 저는 지금 이곳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한편으로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서는 훨씬 더 우리는 강해져야 함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가 박래군을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구속기소한 것은 지난 7월 31일이었다. 그 뒤 검찰은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를 추가했다. 6월 22일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서 박래군이 세월호 참사 당일인 지난해 4월 16일 박근혜가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해진 데해 항간에 떠도는 의혹을 소개한 것이 ‘명예훼손’이 된다는 것이었다. 많은 법률전문가들은 대통령은 국가기관이므로 명예훼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투옥과 수배를 비롯한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싸우는 박래군은 ‘시대의 횃불’이다. 나는 그를 보면서 1985년 3월 말에 창립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이끌던 문익환 목사를 떠올린다. 그는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기에 청년학생들이 분신 또는 투신을 하면 한밤중에라도 병원으로 달려가서 참혹한 주검이나 환자의 몸을 부둥켜 않고 기도를 올렸다. ‘늦깎이’로 민족·민주·민중운동에 뛰어든 그는 70대 중반이 넘도록 투쟁의 현장에서 잠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박정희 유신독재 이래 무려 여섯 번이나 쇠창살 안에 갇히면서도 “감옥에 갈 때는 신랑이 첫날밤 신부의 방에 살그머니 들어설 때 가슴이 설레듯이 그렇게 간다”고 지인들에게 말하곤 했다.


소설가가 되려고 연세대 국문학과에 들어갔다는 박래군은 이번에 다섯 번째 옥살이를 마치고 나오면 가족과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나서 소설을 쓰는 것이 소망이라고 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사건을 계기로 일부 출판사들의 권력화와 지나친 상업주의, 무뎌진 윤리의식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나는 1970~80년대에 독재정권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문학성이 뛰어난 리얼리즘 소설들이 활발히 생산되던 일을 거울로 삼아 현재 작가들이 치열한 반성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박래전의 삶 자체가 소설이라고 본다. 그가 인권운동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을 여투어 지난 30여년 동안 현장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대하소설로 쓴다면 리얼리즘의 새로운 경지를 열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에게는 그렇게 할 만한 창의력과 필력이 충만하다. 그런 소설이 나오는 날 그와 동지들이 조촐한 술잔치 자리에서 흥겹게 담소하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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