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새누리당의 ‘걸작’ 국회선진화법

-의회민주주의 진수 보여준 필리버스터

박근혜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2012년 5월 2일, 바로 그 당이 주도해서 국회에서 의결한 ‘국회선진화법’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는 말로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지난 23일 오후 7시 5분 국회에서 시작된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합리적 의사 방해를 위한 무제한 토론)가 27일 밤 11시 5분이 지나면서 100시간을 돌파했다. AP통신은 27일자 서울발 기사를 통해 “한국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필리버스터가 90시간을 초과해 세계 역사상 가장 긴 기록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기존의 최장 기록은 2011년 캐나다 새민주당(NDP)의 58시간이라고 한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테러방지법안을 직권상정하라고 압박을 가한 데 대해 국회의장 정의화가 굴복한 것이 기폭제가 된 필리버스터는 뜻밖에도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그 기획을 주도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이종걸은 지난 27일 오후 발표한 성명서에서 이렇게 실토했다.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시작할 때는 이렇게 호응을 받을 줄 몰랐다. (···) 의원들의 준비가 부족한 채로 나가면 국민들에게 오히려 실망을 줄 수 있다. 언론환경이 불리한 상황에서 장시간 발언하다 보면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은데, 2시간 발언하면 종편 뉴스 프로그램에 1주일 치 공격 감을 제공할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테러방지법이 민주주의와 인권보호에 악영향을 미칠 독소조항이 많은 법임이 분명하고, 국민들은 그 사실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알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제한 토론을 결정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2013년 2월 이래 국회는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기로 돌아가는 듯이, 행정부를 견제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위축되어 왔다. 그러니 뜻있는 주권자들이 “도대체 야당 국회의원들은 무엇을 하려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고 꾸짖어도 제대로 변명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무기력하게 다음 총선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야당 의원들에게 활화산에서 솟아나오는 것 같은 열기를 불어넣어 주는 필리버스터 사건이 터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김광진, 은수미, 신경민, 정청래, 정의당의 박원석, 김제남 등이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 국회방송으로 생중계되는가 하면 진보적 매체들이 그 내용을 압축해서 전달하자 야권 정치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들은 박근혜 정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회를 통과시키려고 하는 테러방지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결연하게 전선에 나선 ‘투사들’로 대중의 머리에 각인되었다.

노태우 정권 시기에 정보기관에서 갖은 고문을 당한 탓에 지금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은수미는 10시간 18분 동안 물만 마시며 테러방지법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죽이고 인권을 유린할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때로는 비장하게 지적했다.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이 ‘막말 정치인’이라고 공격하던 정청래는 그 어떤 의원 못지않게 해박하고 설득력 있는 논조로 테러방지법안이 왜 폐기되어야 하는지를 주권자들에게 알렸다. 무려 11시간 39분 동안이나 초인적 투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는 아버지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기로 돌아가려는 박근혜를 향해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지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필리버스터가 나라 안팎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자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 듯이 보였다. 박근혜는 대통령 취임 3년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국민경제자문위원회의에서 “많은 국민이 희생을 치르고 나서 (테러방지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얘기인지, 이것은 정말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격분한 목소리로 “사회가 불안하고 어디서 테러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황 하에서 경제가 또 발전할 수 있는가”라고 소리치며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려치기도 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야당의 필리버스터에 대해 “정신 나간 짓” “제2의 광우병 사태” “국민 볼모 선거운동”이라고 거칠게 공격했다. 과연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그들 스스로 앞장서서 만든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는 야당 의원들을 그렇게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 기간에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 캠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상돈(중앙대 명예교수)의 증언이 명확한 답이 될 것이다. 그는 2015년 5월 15일 자 대구 <매일신문>에 기고한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국회선진화법을 제안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에는 황우여 부총리, 이주영 의원, 권영세 전 의원이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그리고 사무총장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법률가 출신이고, 필자 역시 법학교수였다. 그 중 어느 누구도 국회선진화법이 위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박근혜 위원장도 그러했다.

국회선진화법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원하면 최장 100일까지 무제한 토론을 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도 박근혜와 새누리당 지도부는 엄연한 현행법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야당 의원들이 ‘반국가적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듯이 몰아붙인 것이다.

조선·중앙·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신문들과 TV조선, 채널A 등 종편방송은 마치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대변자처럼 필리버스터에 대해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들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은 채 필리버스터를 계속하고 있는 야당 의원들이 ‘국정 마비의 주범’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물 참고 기저귀를 차고 있다’는 따위 저질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언론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보수매체들이 그렇게 총공세를 벌이는데도 필리버스터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보수매체인 MBN이 ‘리얼미터’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2월 26일 발표)를 보면 테러방지법 ‘원안 통과’ 42.0%, ‘수정 통과’ 또는 ‘입법 반대’ 48.9%였다. 중앙일보가 지난 24일부터 시작한 조사(‘테러방지법안 처리를 막기 위해 야당이 43년 만에 부활시킨 필리버스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에서는 27일 오후 8시까지 무려 12만여명이 참여해서 80% 이상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자 이 신문은 조사를 중단했는데, SNS에서 항의가 빗발치자 궁색한 ‘해명’을 하기에 급급했다.

야당 의원들이 열정적으로 펼친 필리버스터 연설은 의회민주주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입법권을 예사로 침해하는 행정부, 다수라는 이름으로 소수를 억압하는 집권당의 횡포에 맞서 결연한 대국민 홍보전을 전개함으로써 국회가 살아 있음을 여실히 입증한 것이다. 그리고 국회 밖에서 테러방지법 반대 시위를 벌이거나 여러 매체를 통해 필리버스터를 지지한 사람들은 ‘참여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국민들에게 생생하게 상기시켰다.

한국 민주주의의 앞길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필리버스터가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걸작인 국회선진화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은수미가 10시간 넘게 발언을 한 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린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밥 이상의 것을 배려하는 것이 사람이고, 그래서 헌법이 있다. 인간은 어떤 사람도 탄압받아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 이 글은 <미디어오늘>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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