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 이세돌한테 배워야

- 투철한 프로정신, 지면 ‘내 잘못’, 이겨도 겸손

국제적 거대기업인 구글이 ‘세계 최고의 기사’라고 평가한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를 상대로 펼친 5번기는 나라 안팎에서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바둑은 스포츠 종목으로 꼽히지만, 이번 대국은 단순한 게임을 넘어 인간이 전기문명의 총아인 컴퓨터의 연산(演算) 능력에 맞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한 관심 때문에 바둑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과학자, 벤처기업인, 심지어는 바둑이나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이들까지 흥분하게 만들었다.

평소에 바둑TV를 즐겨 보면서 특히 이세돌의 기풍을 가장 좋아하는 나는 이번 5번기에서 그의 진면목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세돌은 2014년 1월 26일부터 11월 30일까지 중국 기사 구리를 상대로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리는 10번기를 두어 6승 2패라는 압도적 승리를 거둔 바 있다. 그 10번기 초반에 이세돌은 더러 불안한 행마를 하거나 정신적으로 흔들리기도 했는데, 이번 알파고와의 대국에서는 가끔 긴장한 것 말고는 초지일관 놀라운 정신력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아름다운 전사’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이 글의 제목을 ‘정치인들 이세돌한테 배워야’라고 정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20대 총선을 앞둔 한국사회에서 대다수 정치인들이 벌이고 있는 이전투구는 이세돌이 이번 5번기에서 보여준 ‘진실, 정직, 겸손, 과감, 여유’라는 덕목과는 거리가 멀다. 그 누구보다도 대통령 박근혜가 민주사회의 근본인 공정 경쟁의 원칙을 깨뜨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는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테러방지법안 의결을 강행하라는 압력을 가함으로써 총선을 앞두고 ‘공안 위기의식’을 조장하더니 새누리당 공천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자신의 정치적 아성인 대구를 방문해 이른바 ‘진박 후보들’만을 ‘격려’했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꼼수’와 반칙을 일삼고 있는 셈이다.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 이한구는 ‘반박 후보들’을 공천에서 배제하려고 상식에 어긋나는 기준을 적용하곤 했다. 사석에서 박근혜를 ‘누님’이라고 부른다는 윤상현은 술에 취한 채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면서 당 대표 김무성을 정치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폭언을 해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야권 정치인들의 독선, 오만, 자기중심주의, 편협, 여론 무시 등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 맨 앞에 국민의당 공동대표 안철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야권이 연대를 하지 않으면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도 ‘쇠귀에 경 읽기’로 일관하고 있다. 많은 주권자들이 민주주의를 살리려면 야권이 반드시 총선에서 승리한 뒤 정권교체를 이루어내야 한다고 믿는데도 안철수는 ‘패권주의 극복’과 ‘제3당으로 홀로서기’만을 고집하고 있다. 그는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4번기에서 감동적인 불계승을 거둔 것을 보고 이렇게 주장했다.

“모두가 포기하고 절망했지만 오히려 이세돌 9단은 그 어려운 가운데 용기와 신념을 갖고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돌파해냈다. 어려울 때 얼마나 신념을 갖고 잘 견디는가, 얼마나 굳건한 정신력을 갖고 원칙을 지키는가에 있는 것이다.”

안철수는 얼마 전에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버니 샌더스가 연설하면서 주먹을 치켜 올리는 것을 보고 자기와 비슷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제는 이세돌을 소재 삼아 아전인수를 하고 있으니 그저 웃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작업을 실질적으로 ‘지휘, 감독’하고 있는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의 행보도 당 안팎에서 거센 반발에 부닥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가 극우보수언론이 특정한 계파나 인물에 대해 퍼붓는 인신공격을 ‘공천 기준’의 뼈대로 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이다. 대표적인 것이 자타가 공인하는 ‘당 대포’이자 온몸으로 싸우는 ‘전사’인 정청래를 공천에서 배제한 사실이다. 정청래를 열렬히 지지해온 당원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는데도 김종인과 공관위는 재심에서도 그에게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 당의 홍보위원장조차 정청래를 재심에서 구제하지 않으면 무소속 출마를 지지하겠다고 공언했다. 김종인을 실질적 당 대표로 ‘추대’한 사람은 문재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칼자루를 잡은 김종인은 마치 조자룡이 헌 칼 휘두르듯 이른바 ‘친노’의 핵심 인물들을 정치적으로 거세하려 들고 있다. 무기력한 제1야당을 정권교체의 주역으로 탈바꿈시키려면 무엇보다도 합리와 화합을 기조로 삼는 당 운영이 필수적인데 말이다.

더불어민주당을 떠나 국민의당으로 가서 ‘기득권과 패권주의 청산’을 외치는 정치인들의 부나비 같은 행태에 대해서는 여기서 거론할 필요도 없겠다.

이제 다시 화제를 이세돌로 돌려보기로 하자. 그는 알파고와의 1·2번기에서 완패했다. 1국에서는 알파고의 기상천외한 수 때문에 흑으로 반면 승부 정도가 되자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다. 1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상금을 걸고 구글이 제안한 알파고와의 5번기를 ‘인공지능’에 관한 정보나 대국 기록을 보지도 않은 채 선뜻 받아들인 자신의 결정이 섣부른 것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2국에서도 두 집 반 정도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깨끗이 ‘항복 선언’을 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알파고의 불가사의한 실력을 순순히 인정했다. 3국에서는 이렇다 할 실수를 하지 않았는데도 비세에 몰리자 알파고가 하변에 구축한 광대한 집에 침투해서 TV 시청자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결과를 주시하게 만들었으나 아슬아슬하게 지고 말았다.

최근 이세돌의 천적으로 떠오른 중국의 커제는 3국의 결과를 보고 “처참하게 패배한 이세돌은 인류 대표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세돌은 기자회견에서 “이세돌이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세돌은 마지막 5국에서 7.5집의 중국식 덤을 감수해야 하는 흑을 선택하고 알파고와 피 말리는 접전을 벌이다가 근소한 차이가 나자 돌을 던졌다. 그는 국후 기자회견에서 “부족함이 다시 드러난 것 같고,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겸허하게 말했다. 중대한 선거에서 패배하면 책임을 져야 마땅한 정치인들이 이렇게 정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한 적이 있었던가?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 관해 한국 전산학 박사 제1호인 문송천(카이스트 교수)은 이세돌 쪽이 당할 수밖에 없는 ‘불공정한 게임’이라며 “구글의 브랜드 이미지 강화를 위한 희생양이 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3월 14일자 ‘서리풀 논평’에는 이런 글도 나왔다. “알파고는 이미 이겼다. 그것도 ‘완승’이다. 바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바탕 판타지 ‘쇼’를 펼침으로써 알파고, 인공지능,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공룡기업, 구글을 ‘사회화’ 그리고 ‘경제화’ 하는 데 성공했다. 시장에서.” 이런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강하다. 그러나 나는 이세돌이 5번기 과정에서 보인 인간적 성숙함과 진실성, 과감성, 겸손, 그리고 여유를 높이 평가하려는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3월 9일부터 15일까지 텔레비전을 통해 5번기를 지켜보는 한 주 동안은 긴장과 흥분, 실망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중에서도 종합승부에서는 이미 패배한 이세돌이 1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상금이 날아가 버린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놀라운 투지와 전략으로 승리를 낚아챈 4국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알파고는 홀로 움직이는 ‘괴물’이 아니다. 미국 중서부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구글데이터센터의 중앙처리장치(CPU) 1,202개와 그래픽처리장치(GPU) 176개가 1,000대의 서버를 활용해서 알파고가 바둑을 두게 한다. 아무리 최고의 기사라 해도 혼자서는 맞설 수 없는 거대한 컴퓨터 장치인 셈이다. 그런데 이세돌은 세 번의 뼈아픈 패배를 교훈 삼아 4번째 대국에서 통쾌하게 승리했다.

지금 한국에서 주권자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 대중의 사랑과 믿음을 받는 지도자가 되려면 이세돌처럼 철두철미한 ‘전문가(프로)’가 되어야 한다. 그가 이번 5번기에서 보여주었듯이, 정신과 육체가 하나 되어 모든 싸움에 당당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부정이나 모략 때문에 패배한 경우 말고는 깨끗이 자신의 능력이 모자람을 인정해야 한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5번기가 벌어지는 동안 바둑에는 문외한인 수많은 사람들도 이세돌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했다고 한다. 이세돌은 비록 승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세계적인 명사로 떠올랐다. 그가 지금처럼 겸손하고 진실한 자세로 삶과 바둑을 영위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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