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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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눈감은 대법원...기억제거패치 의문이나 ‘간첩은 맞다’ 판결

최승호 프로필 사진 최승호 2014년 10월 15일

뉴스타파 앵커. 해직 언론인. '자백이야기', MBC PD수첩 '검사와 스폰서',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 등 제작.

“맨 앞 줄에 앉은 방청객 여러분은 다리를 꼬거나 팔짱을 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휴대폰은 꺼주십시오. 재판장의 허가를 받지 않은 녹음이나 녹화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법원 형사2법정, 앞에서 2번째 줄에 막 앉았는데 가슴에 번쩍이는 흉장을 단 법정 경위가 나와 경고하기 시작했습니다.


“ CCTV 2대가 모든 장면을 녹화하고 있다는 것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앞 줄의 김영하(가명) 씨가 자세를 곧추세우는 것이 보였습니다. 경리가 나간 뒤 영하 씨는 고개를 돌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시은이는 안 나오는 건가요?”


그는 이시은(가명) 씨가 판결을 받으러 법정에 나올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대법원 판결 때는 피고는 안 나옵니다. 무죄 판결이 나면 아마 구치소에서 나올 겁니다..”


김영하 씨는 오늘 대법원 판결을 받는 여간첩 이시은 씨의 남자친구입니다. 그는 이시은 씨와 함께 탈북해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6개월 동안 간첩혐의에 대해 샅샅이 조사받았습니다. 이시은 씨가 ‘남자친구를 남한의 간첩과 연결시켜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하 씨는 국정원 조사관들의 끝없이 반복되는 신문에도 자신은 간첩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이시은 씨도 결국 자신의 진술이 남자친구에 대한 분노 때문에 한 거짓말이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박준영 변호사가 옆 자리에 와서 앉았습니다. 손을 맞잡고 눈을 감습니다. 기도를 하는 모양입니다. 박 변호사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도 법정 가득한 방청객들이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모두 일어서십시오!”


법정에 가득한 방청객들이 우루루 뒤질세라 일어섰습니다. 4명의 대법관들이 들어와 앉았습니다.


“앉으십시오!”


대법관들은 선고를 시작했습니다. 선고라고 해봐야 판결 이유는 설명하지는 않고 기각이냐 아니냐만 밝히는 약식이었습니다. 마침내 형사 사건 선고. 그 첫 머리가 이시은 씨 사건이었습니다.




2014 도 4256 사건, 상고를 기각합니다



가슴 속에 무거운 돌이 털석 내려앉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 밖으로 나왔습니다. 김영하 씨가 따라 나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상고 기각이랍니다. 시은씨가 간첩이란 거죠. 이해가 되세요?”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개졌습니다.


“아니 시은이는 오기 싫다는 걸 내가 때리다시피 해서 데리고 왔는데, 나는 간첩이 아니고 시은이는 간첩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요? 이건 북한하고 똑 같네요.”



남자친구에게 맞으며 끌려온 남파 간첩?


그의 항변은 강력합니다. 남한으로 오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지 이시은 씨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시은 씨가 남한으로 떠나기 전 날인 2012년 11월 30일 아침에도 가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손찌검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에 도착한 뒤에도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시은 씨는 북한에 아들과 어머니가 있는 상황이었고 경제적으로도 굳이 탈북해야 할 만큼 나쁜 편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함께 동거하던 김영하 씨가 탈북을 강하게 주장하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서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시은 씨는 뉴스타파에 보낸 편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자식도 버리고 둘만 살겠다고 한국으로 간다는 것이 눈물이 났습니다. 국경을 넘는 것이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영하보고 너만 가라 나는 뒤에 아이를 데리고 더 깊이 생각해보고 가겠으니 요번엔 너만 가라 했더니 순간 폭행을 해서 죽도록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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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은씨가 뉴스타파에 보낸 편지


맞아가면서 억지로 끌려 남한에 온 사람이 어떻게 간첩이겠습니까?


그러나 대한민국 법원은 한 번도 김영하 씨의 진술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2심까지 변호사, 검사, 판사, 그 누구도 그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합동신문센터에서 풀려난 뒤에는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남한에 적응하기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뉴스타파와 민변 변호인단은 2심 판결이 끝난 뒤에야 이 사건을 알게 됐고 , 수소문해 그를 찾았습니다.


뉴스타파는 그의 진술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대법원에 가서 진술할 방법은 없으니 영상으로 제출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변호인단과 뉴스타파 취재진은 김영하 씨 진술 외에도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새로 찾아냈습니다. 그 것들을 ‘국정원, 거짓말 탐지기를 속인 여자’에 담았습니다. 뉴스타파 보도 이후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취재에 나서 새로운 사실들을 여럿 발굴해 방송했습니다.


그 뒤 대법원의 장고가 이어졌습니다. 고법 판결 후 2-3달이면 나는 대법원 판결이 6개월이 넘게 나지 않았습니다. 변호인단에선 희망 섞인 관측들이 나왔습니다. 대법관들이 이토록 장고하는 걸 보면 분명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판결 결과는 전혀 예상과 달랐습니다.



국정원 조사관들이 진술거부권을 고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대법관들은 이시은 씨가 무려 6개월 가까이 중앙합동신문센터 독방에 갇혀서 한 자백에 ‘임의성이 있다’ , 즉 ‘강요받지 않고 자의로 한 자백’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대법관들은 심지어 “피고인이 국가정보원 조사관들로부터 수사를 받으면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진술거부권을 고지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까지 추정했습니다.


그러나 대법관들의 이런 판단에는 국정원 조사관들도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이나 보위사 홍씨 간첩사건 판결에서 법원이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의 진술 내용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은 것은 국정원 조사관들이 진술거부권과 변호사선임권을 고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조사관들은 재판에서 ‘우리가 하는 조사는 행정조사이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이 요구하는 진술거부권 등 고지를 할 법적 의무가 없다’고 자신감 있게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대법관들은 국정원이 이 사건에서는 예외적으로 법적 절차를 지켰을 것이라고 ‘추정’을 한 것입니다.



‘거짓말탐지기 회피 약물’에 대해 의문이 든다고 간첩이 아닌 것은 아니다?


대법관들의 판단은 자백의 신빙성에 대한 부분에 접어들면 더욱 점입가경입니다. 특히 핵심적인 문제인 거짓말탐지기 회피 약물에 대한 판단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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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은 씨는 국정원에서 자신이 보위사령부 보위부장으로부터 거짓말탐지기를 통과할 수 있는 패치를 받아 침투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그 패치를 머리와 목 뒷 부분에 붙이면 기억이 사라지고 , 떼면 일주일 내에 기억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보위부장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 제거 패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만난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신경약리학 전문가인 성균관대 장춘곤 교수는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약물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어떤 기억을 좀 더 살리려는 연구가 더 우선이지 있는 기억을 없애려고 하는 연구는 아직은 굉장히 후순위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법관들은 여기서 이상한 논리를 구사합니다. “거짓말탐지기 검사 회피 약물에 대한 진술에 의문이 든다는 사정만으로 피고인이 간첩행위를 목적으로 위장 탈북한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진술이 신빙성을 잃는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설사 거짓말탐지기 회피 약물을 가져왔다는 진술이 의문스러워도 다른 증거들이 있는 만큼 간첩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말탐지기 회피 약물은 이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입니다. 국정원은 북한 보위사령부 보위부장이 이시은 씨를 남파하면서 국정원 거짓말탐지기에 적발될 것을 우려해 자신이 딱 5 쌍만 갖고 있던 패치 2 쌍을 이 씨에게 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시은 씨는 그대로 패치를 이용해 거짓말탐지기를 통과했다는 것이 국정원 수사 내용이자 자백내용입니다. 여기서 만약 거짓말 패치에 대한 진술이 거짓이라고 가정한다면 나머지 진술은 과연 진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요? 대법관들은 그런 판단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진술들을 한 번 보죠.


보위부장은 이시은 씨를 남파하면서 ‘정착금이 1백만원 오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것 같은데. 탈북자에 대한 배려가 있을 거요.
동무가 한국에 도착하면 정착금도 기존 6백만 원에서 7백만 원으로 1백만 원이 인상될 겁니다.



그러나 이 진술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뉴스타파는 이 씨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태국에서 함께 수용돼 있던 동료 탈북자를 취재한 결과 “2013년 1월 초 한 탈북자가 한국의 가족에 전화하는 과정에서 ‘정착금 1백만 원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탈북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그래서 모두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시은 씨도 합동신문센터 조사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조사관들에 의해 보위부장이 한 말로 둔갑했다는 것입니다. ‘보위부장의 정착금 인상 발언’은 거짓말탐지기 회피 약물과 함께 이시은 씨가 간첩이라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 근거는 사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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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은씨와 함께 있었던 동료 탈북자는 “정착금을 올린다는 소식은 다른 탈북자로부터 들었다"고 증언했다.


기왕 시작했으니 다른 증거들도 살펴볼까요?


보위부장이 이시은 씨의 상부선으로 지목한 김 모 씨는 이 씨가 탈북한 뒤 다른 혐의로 체포돼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고 합니다. 김영하 씨와 탈북해 남한에 살고 있는 김 씨의 딸이 북한의 지인들로부터 확인한 내용이랍니다. 보위부장이 이시은 씨를 남파하면서 약속한 유일한 댓가가 ‘가족들을 돌봐주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남동생도 상부선 김씨와 함께 투옥됐다고 합니다.


아무리 북한의 체계가 무너졌어도 공작원을 파견한 뒤 상부선과 공작원의 가족을 한꺼번에 감방에 집어넣는다는 게 이해가 되는 일일까요? 또 한 가지, 상부선과 연락할 때 쓰라며 준 암호명 ‘아가’는 남자친구 김영하 씨가 이시은 씨를 사랑한다는 의미로 부르던 애칭이었다고 하네요.



피고인이 증거를 늦게 제출했으니 검토하지 않겠다?


그러나 대법관들은 뉴스타파가 발굴한 이 새로운 증거들을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대법관들은 이시은 씨가 이 증거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2심까지 제출하지 않았으니 귀책사유는 이시은 씨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피고인이 상고이유서 제출기간 도과 후에 제출한 자료들을 기록과 대조하여 살펴보면 그 대부분은 피고인이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어 원심 변론종결 전까지 증거신청을 할 수 있었던 자료들인 바 , 피고인은 원심 변론 종결 시까지 위와 같은 증거신청을 하지 아니하다가 상고이유서 제출기간 도과 후 비로소 관련 자료를 제출하였으므로 , 피고인에게는 이를 제출하지 못한 데 과실이 있어 그 신규성이 인정되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대법원 판결문에서 본 위 문장이야말로 대한민국 법원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법원은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법적 안정성을 우선해 판단한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새로운 증거를 들이밀면 법원이 헷갈려서 살겠냐는 겁니다.


그러나 이시은 씨는 대한민국 사법시스템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국정원 직원들이 번복하면 7년 형을 먹는다고 말해 겁이 나서 자백을 계속 인정했다’고 합니다. 인권 개념이 없는 북한이라는 곳에서 살아온 그녀 입장에서는 국정원 직원의 그 말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녀가 민변 변호사들을 만나 눈을 뜨게 되고 대한민국 법원이 국정원 직원들이 묘사한 것과는 다른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레 포기하고 제출하지 않았던 증거들을 제출한 것입니다. 그러면 법원은 그 증거들을 검토해서 이시은 씨가 진짜 간첩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늦게 제출했으니 증거를 보지 않겠다’니요?


결국 대법원은 ‘오지 않으려는 시은이를 내가 끌고 왔다’는 김영하 씨의 새로운 진술을 비롯해 변호인들과 뉴스타파가 새로 발굴한 50여 가지의 증거 중 대부분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늘의 판결을 한 것입니다. 대법원의 오늘 선고는 그러므로 ‘진실을 확정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배제한’ 판결입니다.



p.s.


대법원 판결을 보기 위해 오늘 많은 기자들이 왔었습니다. 법정 밖에는 카메라들이 쭉 늘어서 있었지요. 파기환송 판결이 나면 대서특필하려는 낌새가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각되자 대법원의 보도자료를 베껴 쓴 기사들이 줄줄이 나오더군요. 어느 하나 이번 판결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은 기사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기자도 ‘기억 제거 패치를 붙이고 거짓말탐지기를 통과했다’는 이 황당한 사건을 취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휘장을 번쩍이며 정숙을 요구하는 법정 경위의 말에 복종하는 방청객처럼 법원의 권위에 복종했습니다.


대한민국 언론의 기사 대부분은 그렇게 생산됩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기사들을 보고 세상을 판단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 국민들은 그 기사들을 보고 ‘간첩을 조작한다더니 여전히 있긴 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