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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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과 배반

안수찬 프로필 사진 안수찬 2014년 12월 04일

<한겨레> 기자

살다보면 묘한 인연을 만난다. 해직기자인 박성호 MBC 기자협회장은 나와 동갑이다. 대학 입학은 내가 1년 먼저 했다. 같은 단과대에서 그는 철학을, 나는 사회학을 공부했는데, 학창 시절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학생운동 근처를 기웃거리던 나의 반경과 착실히 학업에 열중한 그의 영역은 서로 겹쳐지는 바가 없었다.


언론사 입사는 그가 2년 빨랐다. 머리가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나의 대학 후배이자 언론계 선배다. 옛 정치부 기자 시절, 잠깐 조우한 적이 있다. 어느 국회의원으로부터 단독 입수한 자료를 아침신문에 쓰기로 했는데, 어느 MBC 기자가 중간에 껴들어 저녁 9시 뉴스에 내보내게 됐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 따르면 내가 껴든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정중하게 그러나 짜증 섞어 항의했다. 그 역시 정중하게 그러나 짜증 섞어 반박했다. 결국 그가 이겼다. 만만치 않은 기자였다.


세월이 흘러, 나는 신문사의 연수휴직을 허락받아, 그는 방송사 사장(이라기보다는 정권)에 의해 해직되어 언론계를 잠시 떠나 있다. 지난해 가을,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를 시작했는데, 반년 뒤 그가 같은 대학원의 같은 전공으로 입학했다. 심지어 같은 지도교수 아래 공부한다. 나는 그의 대학원 선배를 겸하게 됐다.


대학원 수업 시간, 우리는 ‘유이한’ 40대다. 어느 교수는 우리 둘을 일컬어 “다른 대학원생들에게 모범이 된다”며 칭찬해 주었다. 수업에 열심히 임한다는 것인데, 둘 다 그것 말고는 애착을 형성할 대상이 없기 때문인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매일 기자를 본다. 그는 천생 기자다. 박성호 기자는 법조와 정당을 거치며 그 매체를 대표하는 정통 기자로 생활했다. 아침 뉴스 앵커도 맡았다. 이라크전의 현장에도 파견되어 특종을 내놓았다. 기자 시절 그의 무용담을 듣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자꾸 가슴이 뛴다. 기자의 일을 동경하게 된다. 내가 이미 기자라는 사실은 잊어버리게 된다.


그는 영어에 능통하며 책을 많이 읽고 분석적 사고가 뛰어나다. 무엇보다 사람과 어울리는 능력이 출중하다. 그 가운데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날더러 “글을 쓰면 레이저 광선을 내뿜는다”며 추켜세운다. 칭찬에 약한 나는 표정 관리가 힘들어진다. 우리는 서로를 경외하는 도반이 됐다.


지난 1년여 동안 우리는 두어 차례 매우 진하게 술을 마셨다. 언젠가는 만취한 상태에서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반말하는 친구로 지내자”고 약속했지만, 다음날부터 다시 서로 존대했다. 아마 우리는 평생 이렇게 지낼 것이다.


그는 아무리 보아도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군중과 진영에 휩쓸리는 일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그와 1분만 대화해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는 대학원 열람실에서 <조선일보>를 읽는다. “<한겨레>도 좀 읽으라”는 이야기는 아직 건네지 못했다.


지난 늦여름 오후, 우리는 마주 앉아 각자의 우울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소속된 매체에 대해, 그리고 남은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대화를 술기운도 빌리지 않고 남자와 나누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똑같은 말로 충고하고 답했다. “의무감 따위 그만 내려놓고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일을 하세요. 더 잘 될 겁니다.” “아니요. 여기서 마쳐야 할 일이 아직 남았어요.” 같은 충고와 같은 대답. 우리는 <한겨레> 기자와 <MBC> 기자로 조금 더 살아가기로 했다.


그는 요즘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방송사의 빈 사무실로 매일 출근한다. 빈 사무실에 경비 직원이 가끔 들러 출근과 퇴근 여부를 점검한다고 그는 말했다. 대학원 공부까지 병행하느라 나날이 지쳐가는 티가 역력하다. 아무 일도 주지 않는 사무실에 굳이 출근해야 되는 처지는 해직 기자와 피디들이 벌이고 있는 복직 소송과 관련 있는데, 너무 복잡하여 자세히 적기 힘들다. 거칠게 말하자면, 해고를 확정지을 수 없다는 법원 판결에 따라 잠시나마 출근할 수 있게 됐으나, 방송사는 이에 항소하여 완전복직은 한참 멀었고, 그나마도 해고자들의 출근 여부를 점검하면서 다른 빌미를 찾고 있는 형국이다.


그가 복직을 얼마나 열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함께 한국 언론의 현실과 품격과 미래를 논할 때, 그의 눈은 반짝인다. 그는 언론을 논평하는 일 말고, 언론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안달이다. 그가 ‘1당 10’의 능력으로 출입처를 장악했다는 이야기를 복수의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 역량을 모두 바친 MBC의 경영진으로부터 배반당한 나의 도반은 진보와 보수의 진영 논리가 아니라, 현장에서 사실을 추적하여 보도하는 ‘정통 기자’ 노릇을 세상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MBC 경영진이 이른바 ‘장기 저성과자’를 직권 면직하는 방법이 있는지 법률자문을 받아온 사실을 최근 시사주간 <한겨레21>이 보도했다. 경영진은 반박자료에서 “경영적자를 해소하려는 정당한 경영행위”라고 반박했다. 그들의 말처럼 기자와 피디를 내보내려 음모하는 일의 원인이 경영 적자라면, 가장 정당한 경영 행위는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총사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한국 최고의 기자와 피디를 내쫓은 것밖에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