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는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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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까지 다녀온 후에도 내가 겪은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겪은 일도 여전히 내 머리에 남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이 문제와 연관되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일이 모두 마무리된 후에 나에게 이 문제를 넌지시 물은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런 사건에 대해 질문을 받는 것이 유쾌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뒤에서 미확인 정보를 돌리는 사람들보다는 차라리 직접 입장을 물어주는 쪽이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X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는데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한 번은 내가 사내의 누군가에게 피해자였음을 밝히는 과정에서 놀란 적이 있었다. 나로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했다. 물론 이 판단이 틀린 적은 이 회사에서 여러 차례 있었지만 가해자를 특정 짓는 과정에서 마치 퀴즈를 풀고 과녁을 맞히려는 듯, 놀이거리를 찾은 양 즐거워하는 모습에 당황했다. 이 사람은 성폭력 피해자를 옹호하고 가해자를 공격하는 논리로 오랫동안 SNS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그 후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기대치를 접었고 어쩌다 그의 SNS를 볼 때면 비웃음이 나온다.

내가 피해자임을 말했던 사람 가운데 D와 다른 한 명이 있었다. 이들에게도 나는 피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는데, 이들은 태도가 어느 순간 바뀌었다. 내가 피해를 겪은 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는 가해자를 향해 엄청난 비난의 말을 쏟아내던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내가 오버했다는 식의 말을 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거나 전해 듣고 갑자기 변한 태도에 화만 났는데, 몇 년이 지나서야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나는 피해 내용을 이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X는 가해 내용을 다른 것으로 바꿔 말했기 때문에 만약 내 이야기를 들은 후 X 버전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들은 이런 의견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이들이 나와 X에게 들은 이야기를 취합하면 X가 실수로 내 위에 엎어진 것 가지고 내가 온 회사를 들썩이게 만들고 고소까지 한 것으로 이야기가 완성된다. 뒤에서 의견을 돌리는 대신 나에게 물었으면 이보다는 나은 대답을 해줬을 텐데 나름대로 유능했던 이들이 취재를 마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을 회사에 돌린 것은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하루는 사내 신문이 나왔다. 별 생각 없이 한 부를 집어 사무실에서 읽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성추문과 관련한 바이라인 없는 기사가 있었다. 내용은 그즈음 있던 사건에서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며 가해자는 징계를 받았지만 징계 절차 당시의 태도를 보면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다. 그들의 이름이 적히지는 않았지만 회사 내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어느 사건의 이야기였다. 기사 작성자는 가해자는 떵떵거리고 피해자는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런 문화를 혁파해야한다고 했다. 나는 이 기사의 마지막 단락을 보고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간부급 기자들이 지난날 저지른 드러나지 않았던 성추문, 불과 며칠 전에 일으킨 성추문도 모두 파악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자중을 권한다. 진심이다.’ 무슨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것인지, 정말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만약 아는 것이 이런 식으로 기사를 써도 되는지 등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의문과 분노가 생겼다.

나는 기사 작성자의 생각이 매우 짧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피해자의 입장을 이렇게 잘 안다고 주장하면서 호수에 어떤 개구리가 있을 줄 알고 돌을 던지나 싶었다. 드러나지 않았던 성추문을 알고 있다면 그 사건의 피해자가 이 기사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피해자가 이 글을 보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지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 신문의 제작 담당자를 찾았다. 유관인물 중 하나가 J였다. 찾아가서 기사의 내용에 대해 물었다. J는 대답하지 못했는데 J가 당시에는 기사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나는 이 기사가 밝혀지지 않은 성추문의 가해자를 공격하라고 쓴 것은 알겠지만 피해자가 이 글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냐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이 기사를 삭제하거나 정정보도 조치를 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J와 함께 신문 제작 관련자였던 T와의 일을 회사 수뇌부에게 폭로하겠다고 했다. J는 T와 나 사이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고 나는 당시의 일을 모두 J에게 알렸다. J는 난감해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한 직후에 T로부터 전화가 몇 차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러자 J로부터 연락이 와서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물어 수락했다.

나와 헤어지자마자 J는 T에게 연락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쳤다고 한다. 그랬더니 미안하다면서 당시의 일을 인정했던 모양이다. 나는 해당 기사에 대한 조치를 원했지만 내가 T를 거론한 데서 내가 T의 사과를 받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T의 사과는 굳이 더 받아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더 이상 내게 연락하지 말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T를 언급한 것은 나는 기사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면서 강하게 말하기 위해 내가 가진 카드 가운데 한 장을 J에게 보여줬을 뿐이다. 나는 J로부터 그 기사를 보고 어린 사람이 기사를 썼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는 정도의 말을 들은 게 전부였고 사과도 J에게 받았다. J는 기사에 대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는데 어차피 언론 채널을 통해 내보낸 것이 아니어서 일을 키워서라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어 그만두었다. 다른 사람이 이 기사를 작성한 당사자에게 물었더니 호수에 돌을 던지려던 의도가 맞았다고 한다. 저렇게 쓰면 누군가 찔릴 사람이 있겠거니 하면서 쓴 기사라고 했단다. 다들 이 기사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해주지 않으려 했다. 몇 달 후에 이 기사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만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이때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짚을 생각을 못했다. 아직도 궁금하기는 하다. 얼마나 생각이 짧으면 언론인을 자처하면서 이런 기사를 낼 수 있는지, 사람들은 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쓴 기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지.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한 생각은 사람의 나이와 윤리 수준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회사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나도 어느새 목적을 위해 정치적 수단을 찾는 냉혹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시는 처음 입사했을 때처럼 ‘말 못하는 것이 많은 조직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조직’이라는 순진한 말을 기치로 삼아 살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1929년 10월 25일 7면

축출한 첩이 전후 근 100명

금년에 들어서 열 번째 첩을 살기 싫단다고 불로 지졌다

희세색마의 전율할 범행

 

지난 15일 밤 10시 경에 경북 영일군 곡강면 흥안동 김모의 집으로부터 새어나오는 젊은 여자의 비명하는 애처로운 음향에 놀란 동리 사람들은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전기 김모의 집으로 모여든 사람이 수십 명에 달하였으나 문에는 밖으로 나무를 대고 못을 쳐 굳게 봉하고 방 안에서는 사람으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젊은 여성의 비명하는 신음과 남자의 노호로 일대 소동이 있었다는데 이제 그 내용을 탐문한 바에 의하면 집주인인 김모는 근대 희유의 축첩한으로 지금까지의 첩이 든 것을 통계하면 무려 100명에 달한다하며 금년에만도 벌써 10명째라는데 이 소동이 일어나기 5일 전에 김모는 김말년(22)이라는 여자를 첩으로 데려다 두었던 바, 5일동안 있다가 살지 않고 가겠다하므로 전기 김모는 자기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려한다는 구실로 문을 밖으로 굳게 봉쇄하고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인두를 다뤄 전기 김말년의 국부를 함부로 지져 1개월 이상 치료할 중상을 냈다는데 피해자는 그날 밤으로 10리나 되는 흥해주제소까지 기어들어와 이 사실을 고발하였으므로 방금 경찰은 범인을 잡으려하는 중이며 피해자는 강본병원에서 치료중이라더라.

이 기사는 1929년 조선일보가 내보낸 기사다. 이 시기의 기사에는 바이라인이 없고 전체 기사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내가 이 기사에서 주목한 부분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상을 언론이 다루는 방법이다. 피해자 김말년의 나이와 현재 위치는 상세히 공개된 데 반해 경찰이 잡아야하는 범인 김 모에 대해서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첩을 100명이나 두었고 이 사건의 가해자라는 것만 알 수 있다. 기사를 보고 비분강개한 독자가 가해자 김 모를 잡아 경찰에 넘기고 싶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김 모와 수차례 스쳐지나간다고 해도 말이다. 김 모가 어디서 술이라도 마시고 기사에 나온 이야기를 술술 읊어대지 않는 이상 김 모를 특정 지을 방법이 없다.

이 기사는 오래되었지만 보도 방식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군부대 내 구타사건으로 사망한 윤 일병 사건의 윤 일병은 피해자다. 인터넷을 이용해 윤 일병의 실명이나 신상 정보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가해자인 이 병장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나영이 사건은 가해자가 밝혀진 이후에도 피해자에게 가명까지 붙여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지칭했다. 유명 연예인의 동생 한 명도 군부대 구타사건의 가해자였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예인과 혈연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반면 이 사건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다니던 학교와 학과, 이름 등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2016년 3월 사망한 아동학대피해자의 본명을 사용하는데도 언론은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대다수 언론사가 어뷰징으로 기사를 양산하는 현 체제에서 어느 언론사가 기사를 하나 올리면 그 기사는 순식간에 다른 언론사로 퍼져나간다. 피해자가 정신적 피해보상이라도 요구하려면 한두 언론사만 상대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다수의 언론사를 상대하는 가해자는 제법 있지만 다수의 언론사를 상대할 자금이나 강단을 갖춘 피해자는 거의 없다. 피해자가 용기를 냈다면 법원에 출석해 자신의 피해 사실은 물론, 언론이 자신에게 입힌 피해까지 수차례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승소한들 상처뿐인 승리다. 정신적 피해보상에 대해 언론사가 피해자에게 지불할 금액도 적고 그렇다고 승소를 기점으로 이미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피해자로서의 이미지를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부르면서 사람들은 피해 상황을 불가항력으로 인식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차마 저항하기 어려운 폭력에 노출된 상황을 인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회가 사건을 불가항력으로 인식하면 사회나 가해자는 책임감을 벗는다. 피해자가 어려서, 혹은 약해서 생긴 불가항력의 피해를 사회가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하지만 가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인식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피해자가 너무 많아 가해자의 이름을 붙인 사건 가운데 김길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이후 언론이 가해자의 어린 시절이나 밝혀지지 않은 비화 등을 찾았고 그 안에서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을 찾아내려 했다. 심리적 원인이 있다고 죄가 없어지지는 않지만 가해자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형성하면서 가해자를 불가항력을 발휘하는 괴물로 만들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없었던 일로 여기고 살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언론이 개입해서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는 거의 없다. 피해자의 감정, 가해자의 심리 대신 일반론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의 입장이나 생각을 보도함으로써 사건 당사자에게 2차 가해를 한다. 이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트래픽으로 수익을 얻는 언론사뿐이다.

2008년 사이버모욕죄가 법으로 제정될 때, 이 법을 가칭 최진실법이라고 불렀다. 배우 최진실의 자살에 악플이 영향을 미쳤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는 유족 측의 요청에 의해 정계가 최진실법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일이 고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런 일에 피해자가 쫓아다니며 요청을 해야하나. 언론이 트래픽이나 시청률, 열독률보다 공익적인 목적을 먼저 생각한다면 피해자의 신원을 보호하는 데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사실 보도에서 어느 선까지가 공익적인 목적을 위한 보도인지는 논쟁할 여지가 있다. 범죄 유형을 알려 새로운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범죄 유형을 학습해 가해자가 되는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대중으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기도 하고 현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기사는 절대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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