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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그 이후

도도 프로필 사진 도도 2016년 08월 02일

중심의 변두리에서

X와 D, G는 사건이 마무리되고 1년 안에 승진했다. 여기 등장한 모든 사람 가운데 나 포함 세 명을 제외하고는 현재 해당 회사에서 현직 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나는 회사를 떠났지만 그 후에도 그 회사에 수차례 출입했고, 혹은 그 회사에서 다시 일할 뻔한 적도 있다.

 

그 회사에서는 직원이 뇌물을 받거나 횡령한 경우 그 액수가 300만원 이상이면 해임된다고 했다. 회사는 돈에 엄격하고 성범죄에 관대했다. 돈 문제는 내부의 누군가가 알게 된 정도면 징계 대상이 되고 덮어주려는 시도도 별로 없지만, 성폭력 가해자는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면 내부에서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해도 안전한 회사 생활이 가능하다. 나는 피해 사실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300만원을 몇 번이라도 지불했을 것이다. 회사 기준에서 나나 다른 사람들이 겪은 성폭력 피해는 300만원어치도 안 되는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 회사를 떠난 이후 글쓰기를 소재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내가 이 회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그 회사를 떠났지만 내가 소재를 모으는 취재 방법이나 글을 쓰는 방식에 있어서 그 회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회사에 불만이라는 것을 가질 줄 몰랐던 입사 초기에는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 노력했다. 덕분에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고급기술을 체화했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하는 일이 올가미처럼 느껴졌다. 지옥 같던 곳을 벗어나기는커녕 내가 그 회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 증명했다. 그 회사에서 익힌 스킬로 그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나와 업무적으로 연락을 하려던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개인정보에 대해 병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가시적인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일이며 공개되면 불이익의 영역이 늘어날 수 있다. 이를 알고도 알리기로 마음먹은 것은 답답해서다. 더 이상 도망치기 싫어졌다. 언젠가 X에게 어디까지 도망갈 것인지 물었던 것처럼 나도 이 일 때문에 어디까지 도망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 아닌 일로 말미암아 나는 왜 신원을 감추고 숨어 지내야 하는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X가 진심으로 뉘우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건 초기와 달리 이제 이 사실이 나에게 아주 중요하지는 않다. 가해자가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X가 사과했으면 나는 괴로운 기억에서 좀 더 빨리 풀려났을 것이다. 사건 후 처음 1년간이 가장 힘들었지만 그 이후로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괴롭다. 시간은 약이 아니다.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피해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는, 개인이 감당하는 피해로 이만큼 파괴적인  다른 사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무지 비유할 다른 피해가 없다. 성폭력 피해는 자신을 지탱하던 몸과 정신, 특히 정신을 뿌리까지 뽑아 던져 버리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피해 구제나 사회적 편견, 가해자 처벌 등으로 논의를 진전시키기 어렵다.

 

이 일은 몇 년 전 얘기고 오래 지나다보니 잊어가기도 한다. 나는 지금 암흑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다. 쉽지는 않았다. 이 작업을 하면서 다시 꿈에 이와 관련된 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취했던 방법은 정답이 아니다. 정답이라고 부를만한 대처가 있을까마는 나는 이 일에서 내가 쓸 수 있었던 모든 방법을 다 써봤기 때문에 관련된 몇몇 사람들에게 원한은 있어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에게 나처럼 대처하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돌아가는 방법인데다 좋은 결론을 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피해자라면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이후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정하기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생존은 사회적 생존보다는 실제적인 생존을 의미한다.

 

나는 고작 일개 조직과의 싸움에서도 졌다. 사안을 알고도 방관하는 조직은 적과 다르지 않았다. 조직 입장에서는 이 정도 가벼운 일은 당랑거철(螳螂拒轍)로 여겼을 것이다. 이런 싸움이 두렵지는 않지만 지쳤다. 더 싸우고 싶지 않다. 마치 단단한 벽을 상대로 혼자 싸우는 느낌이 든다.

 

전체적으로 사적인 이야기지만 이 일이 내가 사회적인 관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다방면으로 생각할 여지를 주는 이야기가 될 것을 확신한다. 나나 X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주변인의 입장에 있었던 적은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X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