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징비록을 쓴다

올해는 한반도가 일제 35년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와 독립을 되찾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지금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언젠가는, 가능하면 빨리, 다시 하나가 돼야 할 북한 땅의 동포들도 똑같이 느끼리라고 믿는 뜻깊은 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니 강대국들이 갈라놓은 이 분단이 70년을 맞은 지금까지 여전히 갈라져 아웅다웅 싸우고 있다.

올해는 또한 한국인들에게는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 헌법을 가진지 67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국민주권을 선언한 지 환갑을 훨씬 넘겼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국가정보기관이 선거운동에 깊이 개입한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성직자들이 앞장서 불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도 대통령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사과 한마디 없다. 고등법원이 국정원의 대대적인 인터넷 트위터 댓글 활동을 선거법 위반이라고 판결한 이후에도. 대법원이 청와대 편이라고 확신한(?) 때문이었는가? 유신 이후 한국의 사법권 독립이 정치망령을 한 것 같다는 소리가 커지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동안 군대가 민주적 선거를 통해 수립된 정부를 총칼로 뒤엎은 것이 몇 번이었던가? 민주주의 넥타이를 맸지만, 핫바지를 입고 있는 꼴이 한국의 민주주의였다. 그래도 서구 언론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대학생과 민주시민들의 반독재 항쟁으로 아프리카나 중동지역 국가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높이 평가해 주고 있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칭찬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유럽 수준의 민주주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유럽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 대통령 중심제의 대통령 선거운동에 개입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있는가? 유신 정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공화국이 아니다. 군사독재였다. 우리는 4반세기를 실질적인 군사정권 아래서 살았다.

민주헌법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 정치체제는 전혀 달랐다. “사이비 민주정권”에 대한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가 67회 제헌절을 맞아 “반(反)한법행위자 열전”을 편찬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위선 민주주의”를 고발하고 그것을 바로잡아보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고 본다. 편집진(33인)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후퇴시킨 인물들의 열전(列傳)을 엮어낼 계획이란다.

67주년 제헌절을 하루 앞둔 7월 16일, 한홍구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반(反)헌법행위자 열전”을 편찬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김기춘이 비서실장이 되자마자 통합진보당 내란음모사건이 터졌고 간첩조작사건이 또 터졌다. 저 세력이 아직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군복을 입었던 자들이 양복으로 갈아입은 것뿐이다.

한 교수가 ‘반(反)헌법행위자’ 대상으로 예시한 인물들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정홍원 전 국무총리, 황교안 현 국무총리,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이완구 전 국무총리 등 박근혜 정권의 핵심부에 있었거나 그들과 유사한 성향의 인물들이다.

한 교수는 이러한 ‘기록’은 현 정권 인사들을 포함한 권력층의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어쩌면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란, 고문조작 등에 가담하며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가치를 훼손한 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법정’에 서지 않고 승승장구한 이들을 기록하고 ‘역사의 법정’에 세우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할 몫이다. 기록은 그 자체로 힘이다. 오히려 두려움은 ‘반(反)헌법행위’에 앞장서고 일조한 이들의 몫일 것이라고 말했다.

“열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에 이른 것은 우리가 광복 이후 과거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 역사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청산”은 거국적 증오와 비난의 대상이 된 정권이 교체될 때는 한번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잘 알려진 대로 프랑스는 1940-44년 나치 점령하에서 부역한 자들을 “부역죄”로 처벌했다. “숙청”이었다. 역사청산은 새 정권이 구(舊)시대의 부패한 가치를 배격하고 새 시대가 준수해야 가치관을 제시하는 국가적 과업이다.

역사청산 이후 프랑스에서 나치 이념은 축출되고 민주주의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 초기 즉결처분을 받은 9천여 명 외에 1만 명에서 1만 1천 명이 사법절차를 통해 사형 또는 징역형을 받았다. 언론인 지식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점령 기간에 쓴 글이나 방송 내용에 따라 응분의 처벌을 받았다. 원직으로 복귀하는데 몇 년씩 제약을 받았다. 경제인들도 적극적 부역자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나치에 부역한 자들이 해방 이후 다시 활개 치는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됐다.

프랑스만이 아니었다. 나치가 점령한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에서도 숙청이 있었다. 인구 비율로는 프랑스보다 더 많은 부역자가 이들 국가에서 “청산”됐다.

독일은 패전과 더불어 나치에 대한 숙청이 있었고 통일 후 동독 공산독재 때의 범죄에 대한 단죄가 있었다. 반세기 동안에 역사청산을 두 차례 겪은 셈이다.

그런데 한국은 역사청산이 없었던 드문 나라였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미소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이 과거사 청산보다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을 우선하면서 소련과 대결하는 데 필요하면 전쟁 시 적국과의 협력을 권장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을 그 대표적인 경우로 꼽았다. 이승만은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제의 경찰과 친일파 재벌들을 포용하는데 미국의 정책을 활용했다. 그는 친일파의 반민족 죄를 묻지 않고 그들을 발탁했다. 친일파들은 주요 관직과 일제의 “적산(敵産)”을 장악하는 특권을 누리게 됐다. 오늘날 친일파 후손들이 정권과 경제권을 독과점하고 이 나라를 정상배 1들이 득세하는 나라로 타락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소련도 공산정권 붕괴 후 역사청산을 하지 못한 점에서 우리와 비슷하다. 소련은 공산독재가 74년간이나 지속해 야당이 존재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소련 붕괴 후에도 정권을 잡은 것을 공산당에서 갈라져 나온 친(親)자본 공산주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민영화된 국유재산을 싸게 불하받아 일약 세계적인 재벌로 변신했다. 그래서 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붉은 재벌“이 됐다. 역사청산이 없었기 때문에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색깔만 바꿨을 뿐, 과거 공산당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다. 역사청산이 없는 정권교체는 국민들의 이익과 아무 상관없는 권력 이동에 불과했다. 그 점에서는 우리나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말만 주권자이지 실제로 힘없는 국민이 할 수 있는 투쟁은 반(反)헌법행위자 열전 같은 것을 편찬해서 권력욕에 빠진 정상배들을 고발하고 그런 글이 많이 읽혀 선거에서 부도덕한 정상배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이라는 발상에 공감한다. 힘없지만 투표권은 가진 민주사회 99%의 소시민들이 막강한 1%의 기득권 세력과 싸우는 길은 이것이 아주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홍구 교수와 그의 편집진 33인이 기획하는 반(反)헌법행위자 열전이 출판되면 99%의 호응을 받게 되리라고 믿는다. 탐욕에 눈이 어두운 정치인들이 읽어야 할 현대판 징비록(懲毖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각주:

  1. 정상배 : 정치가와 결탁하거나 정권(政權)을 이용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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