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축제가 끝나고 빅브라더의 감시를 두려워해야 할 시대로

2월 23일 저녁부터 3월 2일 밤까지 9일간 38명의 야당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192시간 27분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벌이며 지금까지의 필리버스터 기록을 깼다. 국정원이 국민의 자유를 감시하고 민주주의를 위축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국민보호와 공공안정을 위한 테러방지법'(테러방지법) 처리를 막기 위해서였다.

새누리당은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했고 친박(親朴) 보수신문과 정권이 장악한 ‘공영방송’과 종편은 필리버스터의 의미를 무시했다.

그러나 필리버스터는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민주국가에서 인정하고 있는 제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 상원이다. 일반적으로 국회에서 법안을 심의할 때 제안자를 제외한 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할당된 발언 시간은 10분에서 20분을 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당은 법안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하지 못한다. 소수당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법안 투표를 막기 위한 비폭력적 수단으로 반대 이유를 세세히 설명하면서 시간을 무한정 끄는 것이다. 물론 필리버스터가 항상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중요한 법안이 통과될 때마다 여야 국회의원 간에 폭력사태가 자주 벌어졌다. 그래서 2012년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국회의 폭력사태를 없애기 위해 선진화법이란 이름으로 1968년 군사정권 때 폐지됐던 필리버스터를 다시 도입했다. 테러방지법안을 둘러싼 이번 필리버스터는 47년 만에 재출현한 현상이다.

▲ 1964년 4월 임시국회에서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5시간 19분동안 발언한 김대중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 1964년 4월 임시국회에서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발언한 김대중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테러방지법은 제안된 지 15년 되는 법안이다.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을 침해할 독소들이 내포됐다는 이유로 야당이 반대해서 15년이나 끌어온 문제의 법안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유난히 테러방지법 처리를 강조해왔다.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조차 별 호응이 없었던 법안인데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유도탄 발사를 계기로 박 정권은 갑자기 테러방지법 처리를 밀어붙였다. 그래서 정치적 동기에 의문이 제기됐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이 법안을 직권상정한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얼마 전 타계한 이만섭 전 의장을 국회의장의 모델로 삼고 여야를 초월해서 국회를 운영하겠다고 자주 말해왔다. 청와대의 요구라도 원칙에 어긋나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테러방지법은 국회선진화법에 규정된 직권상정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는데도 직권상정해서 야당이 강하게 반발했다. 정 의장이 ‘변심’했다는 소리와 함께 그 배경에는 청와대의 강력한 압력(?)이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청와대가 정 의장에게 압력을 가했다면 4월 총선과 연관됐으리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박근혜 정권의 지난 3년 실적은 낙제점에 가깝다.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해야 남은 기간 동안 박 정권의 레임덕을 막을 수 있다. 그 이후의 ‘박근혜 권력’ 체제 구축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테러방지법은 아주 위험한 법이 될 것 같다. 분단 상황에 있는 남북한 정권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는 것은 ‘정상’이다. 김정일의 조카뻘 되는 이한영이 암살됐다거나, 탈북한 북한 보위부 부위원장 탈북한 고영환에 대한 암살 지시가 내려졌다는, 근거도 불확실한 보도를 거론하며 테러방지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런 정도의 보복 행동은 국가 간에는 당연히 예상하고 대비할 일이다. 테러방지법의 필요성을 주장할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테러방지법을 만들 명분을 억지로 찾고 있다는 의심을 사게 할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는 전쟁상태에 있는 국가 간의 군비 문제이지 테러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테러방지법에 관해 의문과 우려가 크다. 특히 우려되는 점은 법이 국정원에 너무 많은 권한을 주고 있는 것과 그 권한이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에 미칠 해악이 크다는 것이다. 민주국가에서는 예외 없이 테러 관련법을 제정할 때 국민이나 언론이 제일 먼저 제기하는 문제가 국가의 안보를 빙자해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 또는 위축시키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느냐는 의문이다.

더구나 국정원은 대선의 댓글 선전에 개입한 큰 전과가 있다. 또 그 대선 개입을 선거법 위반으로 수사하는 검찰총장을 몰아내려는 정부의 음모에 가담해서, 그의 혼외 아들이 있는 사실을 알아내 사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적극 개입했다. 범죄자가 그 범죄를 수사하는 검찰의 수사를 방해하는데 개입하고, 그 정보를 친(親)정권의 신문에 흘려 검찰총장이 스스로 자리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도록 여론을 조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문제의 신문은 검찰총장 혼외 아들의 존재를 찾아낸 것이 자사 기자들이 어렵게 취재한 ‘특종’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미(美)국무성의 2014년도 인권보고서를 보면 그 정보를 알아내서 그것을 신문에 흘려 검찰총장이 사임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것은 국가의 정보기관이었다. 이런 기관에 권력을 더 얹어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새누리 전가의 보도 ‘73건 도그마’ 깨졌다. 트윗 121만건, 국정원 대선개입 입증(2013.11.22 뉴스타파)
▲ 새누리 전가의 보도 ‘73건 도그마’ 깨졌다. 트윗 121만 건, 국정원 대선개입 입증(2013.11.22 뉴스타파)

국정원이 테러범이나 테러조직을 알아내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정보기관이 테러방지법이 규정한 법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는 것이 아니라 법이 허용한 정보 수집을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악용하고 그것을 친(親)정권의 언론에 흘려 결정적인 순간에 터트림으로써 권력 유지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정보기관이 테러방지법을 남용하는 것은 위법이다. 그러나 수천수만 명을 거느린 비밀조직이 가진 정보를 내부자가 아니면 또는 “하늘이 돕지 않으면” 알아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보기관을 장악한 권력은 영구집권도 가능하다는 가설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 박근혜-새누리 정권이 정보 수집력을 강화한 테러방지법을 행여나 이런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을까, 그래서 민주주의와 국민을 권력의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야당은 무론 언론계나 지식인 사회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테러방지법에 대해서 야당은 물론 참여연대 등 46개 시민사회단체가 반대하고 있는 주요 이유일 것이다.

이것은 상상력을 동원한 가상의 현실(VR)이 아니다. 이미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자타가 동의하는 미국에서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간첩을 잡아야 할 연방수사국(FBI)이 2차 대전 후 냉전시대에 자행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FBI에 관한 권위자인 역사학자 애이탄 씨오 해리스(Athan Theoharis)가 그의 저서 <FBI와 미국민주주의>에서 지적하고 있는 사실이다.

FBI가 사찰을 실시하고 사회조직의 장에게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특정 인물을 고용하거나 해임하도록 압력을 가하거나 언론에 정보를 흘림으로써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에드가 후버 FBI국장은 방첩프로그램(COINELPRO)을 창설해서 조사 대상 조직 내부에 침투하거나 불화의 씨를 뿌리고 언론이나 법 집행기관에 불리한 정보를 누설함으로써 정치적 반체제자들을 무력화시키는 프로그램을 실천했으며 공산주의 위협에 관한 여론에 영향을 주기 위해 의회 의 국회의원들에게 특정 개인들에 관한 불리한 정보를 유포했다.

유신 때 안기부가 언론투쟁을 벌이던 동아 조선 기자들을 신문사에서 축출하게 하고 40년 동안 취직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잔인한 수법을 감행한 것도 모두 FBI에서 배운 수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2일 국회가 새누리당 의원 단독으로 가결한 테러방지법 역시 이런 과거를 반복할 가능성이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악법인 테러방지법은 국회에서 이미 가결됐다. 이제 국민이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는 국민이 앞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민주적인 정당 출신을 국회에 많이 보내야 하고, 다음으로 국정원이 정권이 아니라 국민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충실하도록 국정원이 정권의 반민주적 ‘음모’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지를 부단히 감시해야 한다. 특히 이런 음모에 가담해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반민주 언론의 역할을 감시하고 비판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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