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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대 정신과 필요한 영화

최광희 프로필 사진 최광희 2015년 07월 22일

영화평론가

대학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할 때, MBC 피디수첩의 광우병 보도에 대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광우병 보도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이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보도가 팩트를 왜곡해서 여론을 호도했는지, 경각심을 일으킨다는 차원에서 맥락적으로 필요한 보도였는지에 대한 입장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피디수첩의 보도를 옹호하는 입장에선 언론의 '시대정신'을 중요한 논거로 삼았다. 요컨대, 언론은 정치 권력과 기득권 세력의 부조리를 감시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당대에 그러한 역할이 필요하다는 현저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엔 가차 없이 나서야 한다는 게 시대정신의 요지다.


이를테면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에게 필요한 시대정신은 무엇이었을까. 일제와 친일파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군사 독재기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을까.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국가 권력의 폭력에 의해 훼손된 민주주의를 전진시키는 데 나서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시대 정신은 곧잘 당대의 지배 담론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렇다면, 영화는 시대 정신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영화 역시 매스 미디어의 일종이다. 당장 <도가니>라는 작품은 주류 언론이 해내지 못하는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창작자는 시대성에 구속되며,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매체인 영화를 통해 시대를 논평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신 독재 시절에 많은 영화인들이 반공 영화를 만들었다. 반공 영화를 만들면 외화 수입권을 주었기 때문이다(당시의 영화인들은 주로 외화 수입으로 돈을 벌었다.) 쿠데타라는 부정한 방식으로 획득된 국가 권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있어서 국민을 겁박하는 반공 이데올로기만큼 강력한 기제는 없었다. 한국 영화는 그 부당한 권력의 앞잡이로 동원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나, 이른바 '뉴 코리안 시네마'의 주인공들로 나선 일군의 창작자들은 한국영화의 그러한 흑역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박광수는 전태일 열사를 불러냈고(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임권택은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이념 대립의 아픈 역사를 재구성(태백산맥, 1994)했으며, 장선우와 이창동은 상처 받은 영혼과 왜곡된 현대사의 근원으로 광주를 소환(꽃잎 1996, 박하사탕 2000)했다. 그들은 당대의 군사 독재기를 끝내는 시점에 마땅히 표출해야 할 시대 정신, 장악된 주류 매체가 주목하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과 부조리에 주목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영화의 시대 정신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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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에 밀리며 극장가에서 홀대 받은 <소수의견>이라는 영화는 그런 면에서 시대 정신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생각이 있는 창작자는 약자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만약 부당한 강자가 정당한 약자를 핍박한다면, 그러한 상황에 대한 문제 의식을 영화로 옮긴다.


반면, <연평해전>은 해방 이후 70년동안 한반도 이남을 지배해온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에 편승한다. 지배 담론으로써의 반공/반북이 국가 권력의 부도덕을 질타하는 이들을 옭아매는 강력한 무기 역할을 해왔다는 걸 감안한다면, <연평해전>은 맥락적으로 시대 정신의 정 반대에 놓여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배 담론의 동어반복이며, 고로 그것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세력에 아부하는 영화다.


임상수의 야심찬, 그러나 흥행 실패한 영화 <나의 절친 악당들>은 다른 방법론으로 시대 정신을 담아낸다.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된 한판 소동극을 오락영화적인 호흡으로 펼쳐 보이는 가운데, 돈의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의 뒷통수를 세게 갈긴다. 류승범과 고준희 등의 주인공팀 역시 돈가방을 빼돌리지만, 그들의 빼돌림은 '전복'의 쾌감을 뿜어내는 일종의 혁명처럼 보인다. 돈이면 다 되는 이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주인공들은 돈으로도 안되는 것들을 획득한다. 그것은 약자들의 '의리'와 '연대'이다.


오락영화의 실력자 최동훈은 신작 <암살>에서 한국영화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친일파 문제를 건드린다. 한국 현대사를 면면히 지배해온 권력자들의 뿌리가 친일파에 있다는 걸, 그는 통쾌한 액션 활극에 담아 까발린다. 처단 당하기 일보 직전의 친일파는 영화 속에서 애원한다. "살려줘. 내가 한 일은 모두 민족을 위한 것이었어." 익숙한 변명이다. 그 변명은 여전히 유효하고, 최동훈은 그걸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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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영화에는 변절자도 나온다. 한 때 독립운동가였지만 일본편에 서게 되는 인물이다. 그 역시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마련됐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나중에 이승만에 의해 해체되며 친일파 청산은 물거품이 된다)’에 끌려 나와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 그는 독립 운동 경력으로 이후의 친일 행각에 대한 물타기를 시도한다. 역시 여전히 위력적인 물타기다. <암살>은 일제강점기라는 과거사를 배경으로 삼지만, 현재성을 획득한다. 한국 현대사의 맥락이 이 영화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


시대 정신을 담아낸 영화는 필요하다. 끊임없이 정당화를 시도하는 기회주의적 지배 세력에 대한 저항 담론이 없으면 세상이 쉽게 거꾸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수의견>은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다.


<나의 절친 악당들>과 <암살>도 필요한 영화다.


반면, <연평해전>은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믿으며 부와 권력을 유지해온 세력에 의해 강제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