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풀이되는 스크린 독과점, 누굴 탓할 것인가

설 극장가의 스크린 독과점 현상(<검사외전>의 1,800여 개 스크린 독식!)을 두고 한탄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 한탄은 10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괴물>이 개봉했던 2006년 본격화해서 거의 매해 텐트폴 시즌(극장가에 관객들이 많이 몰리는 여름과 겨울 시즌을 일컫는 말. 높게 치솟는 동원 관객 수 그래프가 텐트의 기둥을 닮았다고 해서 ‘텐트폴’이라고 부름)이나 명절 시즌에 되풀이되었다. 언론에서 문제 제기도 많이 됐다. 그럼에도 스크린 독과점이라는 괴물은 계속해서 덩치를 키워나갔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촉발한 <괴물>의 스크린 수는 지금으로선 비교적 소박한 700여 개였는데, 그 사이 1,800여 개가 됐다. 극장에 가도 볼 영화가 한두 편에 그치는 환경에 관객들도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이제 한탄마저 새삼스러울 지경이 됐다.

여기서 묻자. 누굴 탓할 것인가. 최대 수익률을 내기 위해 최대치의 스크린을 확보하려는 배급사의 욕망을 탓할 것인가. 장사가 되는 영화에 상영관을 몰아주는 극장을 탓할 것인가. 극장에 많이 걸려 있는 영화에 별생각 없이 몰려가는 관객의 대세 편승 심리를 탓할 것인가.

순진한 이들은 영화 산업의 주체들이 이것을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실제로 영화진흥위원회가 산업 관계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상생” 어쩌고 하는 협약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그 협약은 처음부터 휴짓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제스추어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영화 산업 주체 그 누구도 ‘최대 이윤의 추구’라는 자본주의 작동 기제를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제아무리 문화 영역이라고 할지언정, 그들에겐 상품이기 때문이며, 상품은 최대 이윤을 추구하는 목적성을 이미 내재하고 있다. 독점은 모든 자본이, 모든 상품이 꾸는 꿈이다.

그러나 “영화는 문화이되 상품이다”라는 접근과 “영화는 상품이되 문화이다”는 접근은 천양지차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상품성에 방점을 찍는 것과 문화성에 방점을 찍는 것은 결국 영화 기업의 이윤 추구의 자유에 방점을 찍느냐, 창작자와 수용자(관객)의 문화적 소통과 감수성의 확장에 방점을 찍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개의 문화 선진국들은 후자에 입각해 영화에 접근한다. 그들은 영화를 예술로 대접한다. 그리고 예술을 돈의 논리에만 맡겨 두면 곧 썩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누굴 탓할 것인가. 분명히 말하건대, 화살은 국회를 향해 있어야 한다. 영화 시장의 독과점을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직무유기를 탓해야 한다. 그들에게 과연 ‘문화적 종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탑재되어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탑재되어 있지 않다면, 그 천박성을 비판하고 조롱해야 한다. 이 미친 질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크린 독과점의 견제를 위한 법안 마련밖에는 없다. 문제를 알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이 법안 마련에 주춤거리게 만드는 배후의 역학은 무엇인지 파헤쳐야 한다.

생각이 있는 언론은 그 고리를 파고들어야 한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 다시 불거져” 이따위 동어반복이나 하는 건, 정말이지 한심하다. 범인은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시민의 정신적/문화적 복지라는 차원에서 접근하지 못하는 정책의 몽매함이 진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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