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안녕하세요. 뉴스타파 포럼 입니다.

악당 만드는 슈퍼 히어로, 간첩 만드는 국정원

최광희 프로필 사진 최광희 2016년 05월 02일

영화평론가

요즘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영화는 작정이라도 한 듯 코믹스의 양대 산맥(DC 코믹스와 마블 코믹스) 캐릭터들이 내분을 일으킨다. DC 가문에서 슈퍼맨과 배트맨이 대립(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하더니, 마블 가문에선 어벤저스 멤버들이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 진영으로 나뉘어 싸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내전'을 뜻하는 부제 그대로다. 어벤저스가 분열된다. 내전의 이유는 결국 어벤저스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다. 즉, 그들이 정의를 지키겠다고 나섰는데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이 많아지므로, UN이 그들의 활동 범위를 제약하는 국제적 합의, 이른바 소포비아 협정을 이끌어낸 게 화근이었다. 이 조치에 캡틴 아메리카는 즉각 반발한다. 아이언맨은 일리 있는 문제 제기라며 국제적 합의를 수용한다. 그래서 두 캐릭터가 대립하게 된 것이고, 서로 동맹을 만들어서 싸우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슈퍼 히어로의 내분 상황은, 1) 프랜차이즈 영화의 특성에 기반한 서사적 필연성, 2) 슈퍼 히어로라는 캐릭터 자체에 내포된 모순성으로 구분해 생각해볼 수 있다.


1)의 관점에서 슈퍼 히어로는 끊임없이 악당과 싸워야 하는 존재인데, 이렇게 저렇게 온갖 절대악들을 다 끌어왔으니 이제 더 이상 상상할 수 있는 대립물(타자)을 창조해내기가 마땅치 않게 된 것이다. 그러니 시리즈를 이어가기 위해 서로 싸우는 이야기로 선회한 것이다.


2)의 관점은 미국의 정체성이라는 정치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것이다. 즉, 미국인들의 열망이 투영된 캐릭터인 슈퍼 히어로에는 필연적으로 미국의 역사성이 반영되어 있다. 슈퍼 히어로는 표면적으로는 정의의 사도이지만, 기독교적 문화 속에서 메시아에 대한 만화적 상상임과 동시에, 그 문화적 기의는 주체의 대립물로서의 타자를 전제한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슈퍼 히어로를 재해석한 영화는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인이 아닌 모든 인간을 ‘야만인’이라고 타자화한 것처럼, 주체가 존재 근거를 갖기 위해선 타자가 필요한 것이다. 서구 문명의 역사는 사실 끊임없는 타자화의 역사이기도 하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글로벌 경찰 국가로 군림해온 미국 역시 ‘타자의 창출’을 통해 자기 정당화를 이어왔다. 슈퍼 히어로는 아메리칸 원주민, 공산주의, 제 3세계, 베트남, 중동 등 타자 위에서 존립 근거를 확인하고 군림해온 미국의 정체성이 투영된 상징으로 해석된다. (캡틴 아메리카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적 애국심의 노골적인 상징물임을 상기하자!)


그러나 21세기 이후 911테러라는 거대 사건을 치르고 난 뒤의 미국 사회 일각, 특히 할리우드에서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폭력으로 말미암아 테러의 위협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에서 아름답고 평화로운 행성 ‘판도라’를 파괴하는 주체가, 뭉뚱그려진 지구인이 아니라 자원 약탈을 위해 동원된 ‘미 해병대’임을 명시한 것은 그 자성의 연장으로 읽을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역시 같은 맥락에서 딜레마에 빠진다. 그는 정의를 위해 나섰지만 수많은 짝퉁 배트맨들이 밤거리에 나서 어설픈 히어로 놀이를 하게 만든다. 조커는 단지 악당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배트맨의 얼터 에고(Alter Ego ; 또다른 자아[편집자주])이다. 어벤저스도 일맥상통한 모순에 빠졌다. 즉, 정의를 위하겠다고 나섰지만, 그 나선 행위 자체가 악당을 양산하는 셈이 된 것이다(어벤저스 2편의 악당인 울트론은 아이언맨의 실수로 탄생한 악당이었다). 그러니까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힘이 악당을 만드는 것이다.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국정원의 간첩 조작 사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의 존립 근거는 표면적으로는 국가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그동안 보여온 행태는 타자의 창출을 통한 권력의 보위와 자기 정당화의 연속이었다.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기 위해 간첩이 필요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간첩이라는 타자를 창출했다. 70-80년대 독재 권력에 의해 자주 애용되어온 이런 용공 조작 사건이 버젓이 21세기에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한심한 것을 넘어 처참한 기분을 안겨준다. 우리의 ‘캡틴 코리아’ 역시 저 미국의 슈퍼 히어로들처럼 억지로 악당을 만들어내야만 겨우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신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