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좀비는 누구인가?

좀비 영화의 효시는, 알려져 있다시피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다. 흑백으로 찍힌 이 영화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약간은 조악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좀비 캐릭터가 원래 저예산 B급 영화의 단골 소재라는 걸 감안하면 이해 영역 안에 있다.

어쨌든 이 영화에는 ‘좀비’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원제가 말하듯 살아 있는 시체, 즉 ‘Living Dead’를 공포의 매개로 삼았다. 최근의 좀비들이 바이러스의 유포가 그 원인으로 자주 등장하는 데 반해, 이 영화에서는 인공위성의 폭발로 인한 방사능이 그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의 미국이 우주 탐험 열풍이 한창일 때라는 걸 감안한다면, 우주라는 미지의 공간을 탐문하는 데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슬쩍 엿보이기도 한다.

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 제시한 좀비 캐릭터는 어그적 어그적 걷고, 살아 있는 사람을 공격하며, 그들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좀비에 물리면 똑같이 좀비가 된다는 것도 이 영화가 만든 좀비의 원형적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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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좀비 캐릭터를 창출한 것을 넘어, 좀비의 공격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고립된 가옥에 좀비를 피해 도망쳐 들어온 한 가족과 두 연인, 그리고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모인다. 그들은 공포 때문에 거의 패닉 상태. 그나마 흑인 남자는 조금 더 냉철해서 좀비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문과 창문에 나무를 대 못질을 한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와 함께 이곳에 피신 온 중년 남자는 지하실로 숨지 않으면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끊임없이 그를 조롱한다. (<부산행>과 참 비슷한 설정 아닌가?)

그러니까 이 영화는 좀비라는 캐릭터를 공포의 매개로 불러 왔을 뿐, 실은 공포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노선 갈등이 주요 플롯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공포 때문에 이성을 상실해 버린 사람들은 결국 서로를 공격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들은 좀비가 아니지만, 사실상 좀비와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좀비는 여러 상징성을 가진 캐릭터이다. 바이러스와 전염병에 대한 공포, 혹은 무차별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군중 심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상징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결국 공포가 좀비와 좀비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상황.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 좀비의 원형을 제시한 영화라면, 역시 조지 로메로가 연출한 <시체들의 새벽>(1978)은 좀비를 영화적 소재로 정착시킨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좀비의 상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굉장히 곱씹을만한 부분이 많은 영화이다. 조지 로메로는 불과 65만 달러의 저렴한 제작비를 들여 다분히 문명 비판적인 호러 영화를 창조해냈고, 이 걸작은 나중에 잭 스나이더가 <새벽의 저주>라는 작품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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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들의 새벽>의 기본 설정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과 비슷하다. 세상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좀비들이 창궐하고, 방송국은 특보를 통해 대피소를 자막으로 내보낸다. 방송국 프로듀서로 일하는 여주인공은, 이미 대부분의 대피소가 좀비들에 의해 장악된 상태라 자막을 빼 버린다. 그러자 그의 상사가 소리친다.

자막을 계속 내보내. 그래야 사람들이 계속 TV를 볼 거 아냐!

공포를 판매하는 미디어에 대한 소름끼치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여주인공과 그의 남자 친구를 포함해 네 명의 사람들이 헬기를 타고 북쪽으로 피신을 간다. 그 가운데 두 명은 경찰이다. 그리고 그들은 피신 중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대형 쇼핑몰에 당도한다. 물론 쇼핑몰도 좀비들에 의해 장악된 상태다.

그런데 이 자들, 쇼핑몰의 엄청난 상품들을 보고는 눈이 뒤집힌다. 급기야 아예 여기서 당분간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임신한 여자 친구와 동행중인 남친은 말한다. “이곳은 정말 좋은 곳이야. 여기가 제일 안전해.” 똑같이 좀비들에 의해 장악된 곳인데, 왜 그는 여기가 제일 안전하다고 믿을까? 어쨌든 아무도 지키지 않는 이곳에서 그들은 마음껏 상품들의 천국에서 뛰고 논다. 다만, 유일한 걸림돌인 좀비들만 제거하면 된다. 결국 쇼핑몰 내의 좀비 소탕 작전에 나서고, 밖에 있는 좀비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쇼핑몰 입구를 대형 트럭으로 폐쇄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진짜 적은 좀비가 아니었다. 인근 깡패들이 쇼핑몰을 노리고 쳐들어온다. 이제 그들은 좀비가 아닌 동료 인간들과 주인 없는 쇼핑몰의 소유권을 놓고 싸워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시체들의 새벽>은 영화 내내 쇼핑몰을 배경으로 한 사투를 펼쳐 놓고 있다. 쇼핑몰이 현대 소비자본주의의 물신성을 상징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좀비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도 ‘소유욕’에 휘둘려 대립해야 하는 인간들은, 어쩌면 좀비들보다 더 잔인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물신에 인간성을 저당 잡혀 버린 현대인의 초상을 좀비라는 거울을 통해 비추고 있는 작품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말한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지. 지옥에 더 이상 여유가 없으면 시체들이 땅 위를 걷는다고(When there’s no more room in hell, the dead will walk the Earth).

조지 로메로의 눈에는 쇼핑몰이 지옥으로 보였나 보다.

한국 대중영화 사상 최초로 좀비를 소재로 삼은 영화 <부산행>이 1,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이 시대, 대한민국의 좀비들은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누군가에게는 의견이 다른 이를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폭력적 프로파간다가 좀비일 테고, 종북 타령을 늘어놓으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이 좀비로 보일 것이다. 어쨌든 영화 속이나 현실에서나 좀비와 좀비 아닌 것 사이에는 경계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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