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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쇄신, 개헌, 용기

김종철 프로필 사진 김종철 2014년 11월 27일

녹색평론 발행인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 즉 제헌헌법에는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규정한 조항이 들어 있었다.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체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해서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익균점권’이라는 것은 물론, 노동자들이 노동의 대가로 단순히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한 임금 차원을 넘어서, 노동자는 기업 활동에 의한 성과를 자본가와 동등한 자격으로 고르게 나눠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규정한 조항인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되돌아보면, 제헌헌법의 이와 같은 조항은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이 헌법조항이 실제로 현실에서 반영된 적은 없었다. 정부 수립에 이어 곧장 동족상잔의 대규모 전쟁이 터졌고, 휴전 이후에는 독재정권들에 의해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헌법의 핵심적인 요소는 끊임없이 무시되고 유린되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이익균점권’이라는 헌법조항이 사실상 사문화돼버린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였던지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하면서 이 조항을 아예 말소해버렸다. 그 결과, 일반시민들은 대한민국이 애초에 이러한 매우 ‘진취적인’ 조항을 가진 헌법 밑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살아왔다. 이 무지상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제헌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이 ‘이익균점권’ 조항이 건국 당시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단순히 외국의 헌법(들)을 베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의 국회 속기록은 이 조항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정파 사이의 여러 날 동안의 치열한 논쟁 끝에 성립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원래 이 조항을 주도적으로 제안한 이는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사회부장관이기도 했던 전진한(錢鎭漢)이었는데, 그는 처음에 노동자의 ‘이익균점권’뿐만 아니라 ‘경영참가권’까지 헌법에서 명시해야 한다고 제안·주장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의 격렬한 토론 과정에서 ‘경영참가권’은 통과에 실패하고, 그 대신 ‘이익균점권’은 관철될 수 있었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물론 오늘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친일파 지주계급 출신들이 압도적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경영참가권’이나 ‘이익균점권’ 등 매우 진보적인 아이디어가 공개적으로 제안되고 그것이 국회의사당에서 활발히 토론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노동자의 경영참가권은 끝내 부정되었지만, ‘이익균점권’ 조항이 성립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제헌국회의 모습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선진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익균점권’이라는 아이디어는 근년에 우리사회 일부에서 조심스럽게 논의되다가 꼬리를 감춘 소위 ‘이익공유제’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익공유제라는 아이디어에는 어딘가 대기업과 자본가의 눈치를 보는 왜소한 자세가 엿보이는 데 비해서 ‘이익균점권’ 개념에는 기업 활동의 결실을 나눠 갖는 게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라는 논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 개념을 제시한 전진한의 논리는 명쾌했다. 그에 의하면, “노동을 상품시하여 자본에 예속시키는 것은 고루한 사상”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는 ‘노력’을 출자했다는 의미에서 자본가와 다름없는 자본가이며, 따라서 이윤을 균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얼핏 매우 급진적인 좌익사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진한은 대한노총이라는 우익 성향의 노동자단체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반공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반대했던 것에 못지않게 자본주의 독재체제도 거부하는 ‘자유협동주의자’였고, 무엇보다도 평생 참선수행을 계속한 ‘탈속’의 정치가였다.)


지금 이 나라는 총체적 난국,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사회의 온갖 영역에 뿌리 깊은 불의와 부조리가 활개를 치고, 경제적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중산층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기업화된 주류 미디어의 타락, 상업화된 문화, 비판력을 상실한 학문과 대학, 억압적 교육 등등, 어느 것을 들여 보아도 암울하기만 하다. 기후변화를 비롯한 환경문제, 자원고갈, 에너지 문제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국가정책(혹은 정책의 결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조만간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자체의 존립 가능성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엄청난 파국이 닥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절대적인 책임이 있는 ‘정치’가 완전히 기능 부전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나라에는 저열한 강권통치와 정파들 간의 부질없는 입씨름만 있을 뿐, 정치다운 정치는 완전히 실종 상태이다. 정치다운 정치란 다른 게 아니다. 건강한 상식과 이성에 입각한 대화와 활발한 토론을 통해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절차와 방식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여기저기서 지금 개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처럼 대통령 개인 1인의 인간적 자질과 능력에 모든 국가 중대사를 맡겨놓고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통절히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헌 이야기가 주로 권력구조 개편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은 권력구조 개편도 중요하지만, 총체적인 국가의 쇄신, 혹은 환골탈태가 절실한 때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헌은, 단지 직업 정치꾼들에게 맡겨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해둬야 할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 일부에서는 개헌이 기성 정치권의 담합에 그치는 무의미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개헌 그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담그지 못하겠다는 자세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총체적인 절망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책의 하나로서의 ‘개헌’ 운동이다. 매일같이 수없이 많은 ‘현장’에서 끝없이 불거지고 있는 개별 이슈들에 매달려 싸우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이슈들이 국가쇄신 혹은 정치의 발본적인 갱신 없이는 조금도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허울뿐인 대의제민주주의의 결함과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움직임을 개헌 운동으로 전개시켜야 한다. 그래서 국민발의권과 국민투표, 국민소환제도 등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마땅히 도입하고,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빈민의 생활·생존권, 그리고 침해되지 말아야 할 ‘자연의 권리’도(에콰도르와 볼리비아처럼) 헌법에서 명기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원칙에 비추어 개헌의 주체는 현재의 국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민의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선례가 없는 게 아니다. 아일랜드나 아이슬란드 등 유럽국가는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한 국가파산 사태에 직면하여 국가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한 끝에 헌법 개정 작업에 들어갔고, 그때 개헌작업은 선거인 명부에서 무작위로 뽑힌 시민대표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다.


개헌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설령 ‘시민의회’를 다수 국민의 뜻대로 구성하는 게 쉽지 않다 하더라도, 이 시점에서 국가 쇄신을 위해서는 개헌이 최적의 방법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서 가능한 민주주의의 강화만이 우리 모두의 희망적인 미래를 열 수 있다는 인식을 널리 공유하는 광범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매우 가치 있는 역사적 운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오늘날 이 나라 ‘진보진영’의 가장 큰 문제는 ‘싸가지 없음’이 아니라, ‘용기의 결여’이다. 우리는 제헌국회에서 ‘이익균점권’을 당당한 논리로써 주장하고 관철시켰던 선인들의 용기있는 자세에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