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는 청와대의 곶감인가

고위 법관의 인권위원장 임명, 우려스런 까닭

새 국가인권위원장에 현직 법원장이 내정됐다. 주인공은 바로 이성호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청와대는 대통령의 내정 소식을 전하면서 이성호 법원장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30년간 판사로 재직하면서 법과 원칙, 정의에 충실한 판결을 다수 선고한바, 인권 보장의 확고한 신념과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인권위 발전과 대한민국 위상 제고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성호 법원장의 프로필에는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때 1980년대 조작 사건인 일명 ‘아람회 사건’ 재심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선고하면서 피고인들에게 선배 법관을 대신해 사과한 사례가 따라 다닌다.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리라.

고위 법관의 인권위원장 임명, 우려스런 까닭

이 소식을 접하면서 기대는커녕 우려만 커진다. 현직 고위법관의 인권위원장 임명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내정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자.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독립기구이지만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런데 삼권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기관의 수장으로 현직 법관이 내정되었다는 점은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법원은 행정부의 공권력 행사가 적절했는지 판단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국민과 국가 사이에서 정부의 정책이 옳은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는지 심판을 보는 기관이 법원이다.

어느 날 심판을 보던 판사가 갑자기 자리를 내던지고 행정부의 수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국민들이 그런 판사들과 법원을 믿을 수 있을까.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법원 공무원들로 구성된 법원노조는 성명을 통해 “사법부 독립의 후퇴와 함께 삼권분립의 헌법정신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총리, 장관 등 고위직 인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후보자 낙마도 부지기수여서 인재풀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비판까지 들어야 했다. 결국, 적재적소에 필요한 유능한 인사보다는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는 무난한 인물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청와대로서는 판사를 그 자리에 임명하는 것이 뒤탈이 제일 적다고 보았을 것이다. 고위 법관들은 오랫동안 재판만 해와서 정치인들보다 털어서 날 ‘먼지’가 적고, 인사청문회 통과도 비교적 수월하다는 장점도 있다.

고위법관들로서도 싫을 까닭이 없다. 고법 부장이나 법원장급 고위 법관들은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 외에는 더 올라갈 자리가 없고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 마당에 청와대에서 장관급 자리를 제의하니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최근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자리가 행정부 요직으로 가는 관문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2012년 12월에는 이성보 법원장이 국민권익위원장으로, 2013년 10월에는 황찬현 법원장이 감사원장으로 자리를 바꿨다. 이성호 법원장이 인권위원장이 된다면 벌써 3번째다.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법원 수장이 청와대의 부름을 받고 달려가는 모습을 국민들은 또다시 지켜보아야 한다.

대법관 김황식 감사원장에 이어 현직 법원장들도 행정부로

최근 들어 현직 고위 법관의 청와대 또는 행정부 차출이 너무 잦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김황식 대법관이 감사원장을 거쳐 국무총리가 되면서 그 서막을 알렸다. 2014년 3월에는 최성준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방송통신위원장이 되었고, 3명의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기 위해 법복을 이미 벗었거나 벗으려 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고위 법관들이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을 두게 되는 현상이다.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는 판사로서 소신 있게 재판을 하는 일보다 청와대의 의중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하게 된다. 너도나도 청와대의 ‘간택’을 받기 위해 알아서 처신하는 고위법관이 늘어난다면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사법부는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한 개인에겐 영광일지 모르나 대다수 국민에겐 불행한 일이다.

인권위는 독립기구이고 인권보호를 위한 특수한 성격을 띠는 기구이기 때문에 수장으로 판사가 적임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인권 비전문가인 현재의 위원장보다 더 나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인권에 관심이 많은 고위 법관이 간다고 해서 인권위가 달라지리라 여기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인권위원장에는 인권에 잔뼈가 굵은 전문가가 앉아야 한다.

단적인 예로, 우리 사회에서 해묵은 과제로 남아있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보자. 2005년 인권위는 획기적인 결정을 내린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국방부에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한 것이다. 사회에 던진 파장은 컸고, 곧 대체복무가 도입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도 양심적 병역거부는 여전히 형사처벌 대상이다. 여기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제한하는 일이 정당하다’고 판시한 대법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도 인권위는 인권과 관련하여 대법원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결정을 내려왔다. 이성호 법원장이 인권위원장이 된다면 과연 대법원 판결을 비판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대법원 판례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고위 법관이 인권위에서 할 일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권위의 기구가 축소되고, 위원장에 민법을 전공한 현병철 위원장이 임명되면서 인권위는 인권단체로부터 외면을 받아왔다. 또 인권위는 용산참사나 민간인 불법사찰, 미네르바 사건 등과 같은 정권에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피해가기 급급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엄연한 독립기구임을 고려한다면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는 사람이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권위에는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을 지켜낼 수 있는 소신 있는 인권전문가가 위원장으로 와야 한다.

사법부는 청와대의 곶감이 아니다

사법부는 언제까지 청와대가 곶감 빼먹듯 고위 판사들을 빼가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이렇게 흔들리는 사법부의 현실을 보면, 대법원이 요즘 그토록 강조하는 상고법원 도입은 사치에 가깝다. 대법원은 먼저 사법부 독립과 법관의 독립부터 지켜내는 게 순서다.

청와대와 사법부는 훈훈하게 인사 교류하는 대상이 아니다. 청와대보다는 법원에 책임이 더 크다. 현직에서 정치권이나 청와대에 기웃기웃하는 법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재판권을 팽개치는 법관은 이미 판사로서 자격이 없다. 사법부는 더 이상 청와대의 곶감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 Hyesung kim

    정말 맞는 말이고 인권위가 걱정되네요. 인권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좋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본 글은 뉴스타파 블로그를 통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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