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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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여, 의심하고 검증하라

김용국 프로필 사진 김용국 2015년 08월 28일

법원공무원 겸 법조 칼럼리스트

‘치료비 부담 투병 중 아버지 살해.’


2004년 어느 날 방송과 일간신문은 약속이나 한 듯 이런 제목을 단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는 A씨가 투병 중인 아버지를 간호하던 중 인공혈액투석기 연결호스를 절단해 과다출혈로 숨지게 한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고 밝혔다.


기사는 평소 아버지 치료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 A씨 윗옷에서 혈흔 반응이 나온 점 등을 강조했다. 심지어는 “A씨의 범행이 확실하다”는 경찰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기사 제목처럼 ‘아버지 살해’ 사건임을 암시했다.


그는 정말로 돈 때문에 아버지의 목숨을 끊게 한 패륜아였을까. 이 기사를 본 독자라면 누구나 A씨가 살인범이거나 최소한 살인과 관련된 인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체포 직후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곧바로 기각되어 A씨는 풀려났다. 게다가 그는 2006년 의정부지검에서 최종 ‘혐의없음’ 처분을 받게 된다.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A씨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이유 하나만으로 2년 동안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A씨는 국가와 담당 경찰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고, 법원은 국가의 잘못을 일부 인정했다. 하지만 이미 A씨의 인생은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언론에 잘못된 정보를 흘린 경찰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당시 보도를 보면, 어느 언론도 A씨가 범행을 인정했는지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 또 경찰 자료에 미심쩍은 부분은 없는지 도 관심이 없었다. 그만큼 언론보도는 허술했다. 심하게 얘기하면 경찰 말을 받아적었을 뿐이다.


물론 이건 10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불행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보도 행태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남성을 강간하려한 혐의로 기소된 여성(40대 여성 B씨)의 형사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언론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2013년 형법 개정으로 강간 피해자(객체)가 ‘여성’에서 ‘사람’으로 확대된 이후 첫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 3월 B씨에 대해 남성을 성폭행하려 한 혐의(강간미수)와 흉기로 상해를 입힌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상당수 언론은 비중있게 소개했다.


그런데 기사들의 특징은 B씨가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강간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췄다. 즉 검찰 기소 내용대로 ‘내연남에게 수면제를 먹여 성폭행을 시도한 점’은 기정사실화하면서 법률적인 판단 부분에 관심을 가졌다.


기사를 유심히 살펴보라. 거의 단정에 가깝다.




전씨는 A씨에게 수면제를 탄 홍삼액을 마시게 한 뒤 A씨가 잠들자 그의 손과 발을 묶고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잠에서 깬 A씨가 결박을 풀면서 범행은 미수에 그쳤다. 전씨는 A씨가 도망치자 “다 끝났다. 죽이겠다”며 둔기로 A씨의 머리를 치기도 했다. 검찰은 전씨에게 흉기상해 혐의를 추가했다.
-중앙일보 4월 3일자 ‘여성 첫 강간죄 적용 기소’



상당수 기사에 등장한 ‘수면제’ ‘노끈 결박’ ‘여성 강간’ 등의 자극적인 단어 속에서 B씨는 재판 전에 이미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딴판이었다. 지난 22일 서울중앙지법은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는데 배심원 9명도 모두 무죄로 평결했다. 유력한 증거인 피해 남성의 진술이 믿기 어렵고, B씨가 외소한 체구에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점에 비추어 유죄 입증이 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물론 1심 재판 결과이긴 하지만 그동안 언론보도에서는 B씨의 주장이나 항변이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 흥미 위주로 여성 최초 강간 기소 사건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 B씨가 무죄를 선고받자 언론들은 갑자기 ’누가 이 여성에게 돌을 던지랴‘라는 식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보도가 8월 23일자 연합뉴스 기사(‘국선변호인 집념이 여성 첫 강간미수 무죄 이끌었다’)다. 심지어는 검찰과 경찰의 ‘부실수사’ 논란(내일신문 8월 24일자)을 지적하거나 심지어는 B씨가 ‘강간 누명’을 썼다는 기사까지 등장했다.




‘배심원의 판단을 존중해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라는 판사의 말이 울려퍼지자 푸른 수의 차림의 전모(45)씨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오열했습니다. 이어 바닥에 엎드려 재판부를 향해 연거푸 큰 절을 했습니다. ‘일’이 터진 지난해 7월 이후 그녀에게 쏟아졌던 ‘첫 여성 강간 피의자’라는 멸시와 조롱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서울신문 8월 24일자 ‘현장 블로그’



뒤늦게나마 B씨에게 관심을 보여준 언론사들을 탓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죄 판결전까지 B씨를 ‘내연남 성폭행범’으로 몰아간 책임으로부터 언론사들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정보가 검찰, 검찰 등 수사기관을 거쳐 언론에 노출되었을까. 그리고 그 속에는 얼마나 부정확한 정보가 섞여 있었을까. 수사기관은 고급 정보를 손에 들고 특종에 목말라있는 언론사에 제공한다. 이것 자체를 비판할 순 없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보를 제대로 거르지 않고 ‘팩트’로 보도하는 언론사의 행태다.


과거 군사정권은 선거철이나 수세에 몰렸을 즈음에 간첩단사건이나 공안사건을 종종 터뜨렸다. 그러면 대다수 언론은 조직도까지 그대로 인용하며 받아쓰기에 바빴다. 이런 대형사건 보도는 사실 여부를 떠나 수세에 몰린 정권을 도와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다. 국민의 알권리는 존중되어야 하고 취재나 보도에 성역은 없어야 한다. 문제는 범죄사건 보도에서 언론이 수사기관에 의존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데 있다.


형사사법 절차는 수사→기소→재판→판결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한국의 형사사건 보도는 대부분 수사단계 전후에 집중된다. 수사기관은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하고, 언론은 여과나 검증 없이 우선 보도하고 보는 식이다. 이걸 알권리로 정당화하긴 어렵다.


2가지 사례처럼 언론이 ‘받아쓰기’에만 치중하면 진실 발견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언론이여, 의심하고 또 검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