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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개혁, 부실한 ‘셀프조사’론 안된다

김용국 프로필 사진 김용국 2017년 04월 26일

법원공무원 겸 법조 칼럼리스트


대법원장에게 ‘진상’하는 보고서인가?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가 18일 발표한 진상보고서를 접한 어느 법원직원의 반응이다. 판사들의 사법개혁 학술활동 탄압, 사법부 블랙리스트 논란 등의 진상을 규명하고 의혹을 말끔하게 해소하겠다던 진상조사위원회는 한 달 만에 장문의 진상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요란한 빈 수레에 불과했다.


전직 대법관과 판사들로 구성된 진상조사위가 성역 없는 조사, 의혹해소를 강조했지만, 오히려 대법원이 성역임을 확인해주었다. 온 세상이 대법원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데도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압박하지 않았고, 법관 블랙리스트도 없다’며 면죄부를 준 것이다. 한 마디로 대법원장만을 위한 진상보고서였다.










[대법원 사법개혁 저지 의혹 사건일지]


2월 9일 대법원, 이모 판사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인사발령
2월 13일 대법원, 법원 내 연구회 중복가입 금지 공지 법원 내부통신망에 게제
2월 20일 대법원, 이 판사에 대한 인사발령 취소
3월 6일 경향신문, 대법원의 사법개혁 저지 의혹 첫 보도
3월 7일 고영한 법원행정처장, 법원 내부통신망에 해명글 게재
3월 8일 국제인권연구회 간사, 대법원장에 진상조사 촉구.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양승태 대법원장 퇴진 기자회견
3월 9일 전국 법원장 간담회에서 진상조사위원회 설치 결정
3월 13일 서울동부지법·서울서부지법 등 판사회의에서 진상조사 촉구 의결
양승태 대법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 조사위원장으로 위촉하고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 직무배제 조치
3월 17일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 사의 표명
3월 22일 이인복 조사위원장, 조사위원 6명 선발하고 조사방법 발표
3월 25일 인권법연구회,‘국제적 비교를 통한 법관인사제도의 모색’학술대회에서“판사 10명 중 9명은 대법원장과 법원장, 등에 반하는 의사표시 했을 때 불이익 우려한다”는 설문조사 결과 발표
4월 7일 대법원 ‘판사 블랙리스트’ 운용 의혹 보도
4월 10일 정의당, 국회 진상조사 제안
4월 11일 전국 법원 판사회의 대표들, 조사위에 컴퓨터 저장 매체 등 확보 공식 요구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양승태 대법원장 퇴진 2차 기자회견
4월 18일 진상조사위, 조사 결과 발표



최근 법원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2월 13일 법원 내 판사들의 연구회 중복가입 금지를 알리는 공지가 법원내부전산망(코트넷)에 올라온다. 대법원이 뜬금없이 사문화된 예규를 들어서 내부 학술활동을 제한한 것을 두고 판사들 사이에서는 최근 회원이 급격하게 증가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겨냥한 조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 연구회가 양심적 병역거부, 대법원장 권한 제한, 법관인사제도 개혁 등 대법원이 보기에 껄끄러운 주제로 토론과 연구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2월 20일에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이 모 판사가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받았다가 1주일 만에 취소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판사는 법원행정처 관계자로부터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의 축소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충격을 받고 한때 사직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대법원은 연구회가 3월 25일 열기로 한 학술대회도 법관인사개혁, 대법원장 권한 축소 등이 포함돼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3월 25일 연구회는 학술대회에서 “판사 10명 중 9명은 대법원장과 법원장 등에 반하는 의사표시를 했을 때 불이익을 우려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판사들의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언론에 이 같은 일련의 사실이 알려지고, 급기야는 대법원이 판사들을 따로 파일로 관리한다는 이른바 ‘법관블랙리스트’ 의혹까지 제기됐다. 궁지에 몰린 대법원은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직무가 배제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은 3월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이인복 전 대법관과 판사 6명이 약 한 달간 진상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4월 18일 발표된 50여 장 분량의 진상보고서 어디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를 엿볼 수 없었다. 진상조사위는 ▲판사들의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조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제재조치이고 ▲ 학술대회의 연기 및 축소압박을 가한 점은 부당한 행위라고 보았다. 그게 밝힌 진상의 전부였다.


나머지 핵심 의혹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지었다.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소모임인 인사모 활동에 대한 부당한 견제나 압박이 없었고 ▲사법부 블랙리스트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조사방식부터 문제였다. 성역 없이 조사하겠다던 말이 무색하게도, 대법원장과 행정처장 등 주요 책임자들을 서면조사로 일관하였다. 진상조사위가 확보했다는 물적 자료도 대부분 학술연구회 중복가입문제를 다루고 있는 내용일 뿐, 실제로 행정처가 판사들에게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었다.

특히 블랙리스트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컴퓨터 저장매체 등에 대한 확보,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법원 안팎의 주장을 진상조사위는 외면했다. 더 나아가 해당 컴퓨터를 조사하지도 않은 채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할 가능성을 추단케 하는 어떠한 정황도 찾아볼 수 없었음”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지었다.

진상조사위가 조사한 내용만으로도 법관들의 활동에 부당한 간섭, 개입 사실과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났는데도 법원 수뇌부에게 면죄부를 준 점도 문제다. 즉 행정처 발탁인사, 중복가입 해소조치, 학술토론 발표수위를 낮춰달라는 요구, 해외연수 혜택 등의 회유와 압력 등이 실제로 확인되었다.

대법원장은 일련의 보고를 받았을 것이고, 심지어는 이 판사의 겸임해제 인사발령 결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대법원장, 법원행정처장은 물론, 임종헌 전차장에게도 아무런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법원장에게 무엇을 조사했고, 대법원장이 어디까지 알고 무엇을 지시했는지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진상조사위는 모든 문제의 근본이 연구회 회장이었던 양형위원회 이 아무개 상임위원(고등부장)의 부적절한 행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윗선 개입 의혹을 차단했다는 의혹을 살 수밖에 없다. 그마저도 이 상임위원이 “행정처와 인사모 사이에서 양자의 우려와 입장을 서로에게 전달하고 활동이 법원 대내외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도록 조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 것으로 보임”이라고 두둔하고 있다.

진상조사위의 결론도 한가하기 그지없다. 사법제도와 인사제도를 개혁하라는 목소리가 높은데도 “법관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의견수렴”으로 해결하겠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결론적으로 행정처가 ‘연구회 대책문건’을 작성하고 판사들을 뒷조사한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블랙리스트는 일방적인 추측에 불과하고 판사들의 과잉반응 정도로 치부했다.

사법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사법제도 개선방안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판사들을 격려, 지지하지는 못할망정 회유, 협박, 간섭한 행정처에 면죄부를 주는 조사 결과는 결과적으로 법원 수뇌부만 만족시켰다.

결국, 자체적인 진상규명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특별검사, 국정조사, 형사절차 등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법원노조(공무원노조 법원본부)는 “사법농단의 진상규명을 대법원의 ‘셀프조사’에 맡길 수 없다”며 24일부터 국정조사 요구 청원을 시작했다. 사법개혁을 이어가기 위해 오는 9월 양승태 대법원장 퇴임 시까지 사법부 ‘적폐 청산’을 위해 투쟁한다는 방침이다.


전국 판사회의 대표들도 22일 회의를 통해 “대법원의 사법개혁 저지 의혹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기로 했다. 판사들의 행동이 어디까지 확대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법원 내부에만 맡길 문제가 아니다. 대선 정국에 묻혀있지만, 대법원의 개혁과 법관의 독립도 정권교체 못지않게 중요하다. 주권자인 국민들의 관심이 절실하다.


국민보다 정부의 의중을 먼저 살피는 대법원장, 재판 당사자보다 인사권자인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고 판결하는 판사, 이런 법원을 원하지 않는다면 주권자가 나서야 한다. 대법원의 개혁을 부실한 셀프조사, 셀프개혁에 맡겨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