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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

이지용 프로필 사진 이지용 2014년 12월 22일

독립프로덕션 KBNe FRANCE 책임PD. MBC W, KBS 세계는지금 등 연출

‘더 이상 창피할 이유가 없다, 나는 동성애자이며 그것이 자랑스럽다!!’
‘차별에 대항하여 동성애자, 양성애자들 모두 함께!!’


2001년 7월 파리 동쪽 축제의 광장(Place des Fetes) 에서 출발한 50만(파리 경시청 발표)에 이르는 게이 퍼레이드 참가자들은 프랑스 대혁명의 성지로 불리 우는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을 지나 공화국의 광장(Place de la Republique) 에 도착했고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그들을 맞았다. 그것은 분명 사건이었다. 자신들에 대한 사회의 차별에 대항하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온 프랑스 동성애자들이 만든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 동성애자들의 수난사와 사회적 인정 획득 과정은 프랑스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함께 한다.


1750년 거리에서 포옹을 했다는 이유로 두 명의 동성애자들이 파리 시청광장에서 산채로 화형을 당한다. 동성애는 프랑스의 사회규범과 도덕질서를 파괴하는 범죄행위로 인식되어왔고 기독교적인 규범과 절대주의 왕조가 지배하던 프랑스사회에서 동성애는 사라져야 할 사회악이었다.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대항한 민중의 사회개혁 의지가 만들어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에도 변화를 만들게 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선언의 이념을 바탕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정부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법처벌을 포기하게 되고 그 후 1810년에 제정된 나폴레옹 민법은 법적으로 인정된 성인들 간의 합의된 관계에 관해서는 사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음을 명시하게 된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유럽은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된다. 프랑스에 친 독일 협력 정권인 비시정부가 들어서면서 프랑스 동성애자들의 시련은 다시 시작된다. 독일 점령군에 협조하던 비시정부의 프랑스 경찰은 불법적인 사찰을 통해 작성한 프랑스 동성애자들에 관한 정보를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게쉬타포 에 수시로 제공했고, 수천 명의 프랑스인들이 동성애자들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수용소로 보내져 학살된다.


동성애자라는 것이 또다시 주홍글씨로 새겨졌고, 숨죽이며 감추고 살아야 하는 시간이 다시 온 것이다.


1971년 5월 1일 프랑스 노조 연맹의 노동절 행사에서 동성애 협회 회원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파리 시를 행진하며 동성애는 범죄행위도, 정신병도 아니라고 외치며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1981년 파리에서 1만여 명의 동성애자들이 처음으로 독자적인 행진행사를 벌이며 동성애 차별, 처벌법의 철폐를 요구했고 이 행사는 프랑스의 Gay Pride 모태가 된다.


다시 동성애자들 스스로가 인간으로, 프랑스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


1981년 프랑스와 미테랑(Francois Mitterand) 당시 대통령 후보는 동성애 처벌법 폐지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82년 동성애 처벌법을 폐지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역류시킨 나치 협력 정권 비시정부의 동성애 처벌법이 프랑스 사회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 후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적 차별에 맞서기 위해 많은 협회와 동성, 양성애 노조를 조직해 결집된 목소리와 힘으로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 갔다.


프랑스 게이, 레즈비언 총연합(Federation LGBT) 산하에는 수많은 협회가 존재한다. 그중 에는 프랑스 최고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고등사립( Grands Ecoles)의 동성애 학생들의 협회가 주목을 받았다 . Mousse(Science-Po), Hômonerie (Ecole Normale-superieure), In and Out (HEC Haute Etude du Commerce), 프랑스 사회의 엘리트로 인정받는 학생들의 커밍아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프랑스 사회의 성 모럴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초기 동성애 단체들의 주된 활동이 동성애는 범죄 행위가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 확보에 있었다면 젊은 학생들로 구성된 협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성애자들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 커플의 결혼인정, 자녀 입양 권리 등 동성애는 더 이상 프랑스 사회에서 인정의 여부를 토론할 주제가 아니며 이미 인정된 사항임에 이제는 권리를 주는 것만이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다. 14년간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를 이끈 베르트랑 들라노에 ( Bertrand Delanoe) 전 파리 시장은 자신의 동성애 사실을 당당하게 밝히고 시장에 당선되었고 연임을 하면 역대 파리시장 중 가장 성공적으로 시정을 이끈 시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더이상 정치적인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1999년 10월16일 사회당이 일명 시민연대 협약(PACS법) 이라는 동성애 커플을 이성커플과 같은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이후 2000년 9월 조사된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의 72%가 동성애 부부를 일반 부부와 같이 인정하고 있다고 대답했고, 동성애는 존중 해야 할 성적인 기호이자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성적인 기호에 의해 차별받는 것은 부당하다’ 는 입장을 밝혔다.


2013년 5월 18일 프랑스 국회는 동성애 결혼법을 최종통과 시켰고, 프랑스는 유럽 연합국 중 9번째, 세계 14번째로 동성애 커플 결혼을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장 치열한 보,혁 갈등이라고 까지 표현될 정도로 동성애 결혼인정법에 반대하는 종교, 가족단체들의 집회가 하루가 멀다하고 조직되었지만, 동성애 결혼인정법에 찬성한다는 68 %의 국민 여론을 거스를 수 없었다.




현대 사회 가족의 개념에는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부부 관계로 형성되는 가족과 이제는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만드는 가족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사회 현상에 대한 바른 현실 인정입니다.



PACS법 입안자인 빠트릭 불로쉬 의원의 설명은 30년 전 처음으로 거리로 나온 후 공화국 광장을 메우며 나는 자랑스러운 동성애자라고 외치는 프랑스 동성애자들의 함성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답변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똘레랑스 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