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조현아

심드렁하게 TV뉴스를 흘려보내던 중이었다. 국민 100명 중 95명이 다른 나라들보다 한국에서 갑의 횡포가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그 횡포가 극심하다고 여겨지는 집단으로는 정치인, 고위 공직자, 재벌이 차례로 선정되었다는 등 이른바 ‘갑질’에 대한 그렇고 그런 보도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뉴스의 말미, 응답자들의 85%가 스스로 을에 속한다고 답변했으나 한편으로는 갑질을 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무려 41%에 달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돌연 여러 가지 상념들이 떠올랐다. 갑은 15%에 불과한데 41%가 갑질을 경험해보았다고 한다. 이 기묘한 불균형은 우리 사회 어딘가에 갑이 아닌 이들도 갑처럼 행동하도록 만드는 모종의 기제가 숨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지는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응답자들이 몸소 실천했다는 갑질의 대부분이 고객 내지는 소비자로서의 경험이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나 또한 이러한 소비자 갑질 사례의 예외라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

‘어설픈 갑질’의 추억

얼마 전 베트남에서의 여행 마지막 날,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잠시 짬을 내 숙소주변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허름한 골동품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기에, 또 한편으로는 각별하게 기념이 될 무언가가 아쉬웠던 참이라 먼지 쌓인 가게의 구석구석을 반갑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도기로 만든 동자승 상, 작지만 기품이 있었고 채색도 고왔다. 의외의 성과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호기롭게 가격을 물었다. 물건을 수선하던 가게주인이 부른 가격은 우리 돈으로 약 2만 5천 원 정도, 물건의 질에 비해서는 결코 비싸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흥정을 붙여볼 요량으로 반 이상을 깍아 만 원을 제시하자 주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짐짓 다른 물건들 손질에만 몰두했다. 하여, 내 딴에는 꾀를 낸다고 다른 물건을 하나 더 골라 두 개를 함께 산다면 가격이 얼마가 되겠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동자승 상에 대해 똑같은 가격을 요구하더니 심지어는 응대하기 싫다는 기색마저 내비치는 것 아닌가. 내가 손님인데 장사하는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에 은근히 화가 나서 그냥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내심 제가 돈 벌 생각이 있으면 다시 부르겠지 하는 기대를 품에 안고 한참을 걸어갔지만 부르는 기척은 없었고, 점점 마음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동자승 상이 아른거렸다. 사실 공항 면세점이나 선진국의 상점에서 마주쳤더라면 그 두 배의 가격표가 붙어 있어도 군말을 하진 않았을 터였다. 시작부터 턱도 없이 가격을 후려치고 들어갔으니 나도 잘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역사적인 부채감도 있으니 먼저 접고 들어가야겠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상쾌한 마음으로 돌아선 것도 잠시, 되돌아가 마주친 가게 문은 그새 닫혀 있었다. “참 장사 희한하게 하는군.” 아량을 베풀고자 했는데 거절당한 것 같은 마음에 내가 너무했다는 생각도, 역사적 부채감도 싹 사라지고 다시 화가 치밀었다. 과연 그의 뻣뻣한(?) 태도가 내겐 왜 그리 불쾌하게 느껴졌을까?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소비자로서 행위할 때면 칼자루라도 쥔 듯 쉽게 갑에 준하는 심리상태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노동이 ‘을’이 되는 이유

베트남이든 한국이든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개인은 이론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 모두가 상품의 소유자로서 시장에서 자의에 따라 계약하고 거래하므로 형식논리 차원에서는 갑질이라는 것이 발생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소유한 상품이 화폐인가, 일반 물품인가, 아니면 노동력뿐인가에 따라 힘의 차등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그중에는 화폐의 소유자가 제왕적 지위를 차지한다. 크기에 따라 위력에 차이가 크기는 해도, 화폐는 어떤 가치형태로든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특수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일반 상품의 소유자들은 그 다음이다.

화폐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유통과정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거쳐야 하지만 독점력이 있을 경우에는 화폐에 가까운 지위를 누리기도 한다. 이에 비해 또 하나의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의 소유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집단판매도 어렵고 항시 상대적인 과잉인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가장 위상이 취약하다. 바로 이러한 차등이 실질적인 불평등과 예속을, 나아가 갑의 우월의식과 을들의 무기력, 굴종을 발생시킨다. 소유한 상품이 노동력뿐인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무수한 을들이 그나마 갑으로서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시점은 오직 유통과 소비의 국면에서뿐이다. 자본(금융자본을 제외한)은 축적을 위해 예외 없이 화폐-상품-화폐의 순환을 거쳐야 하고, 따라서 선택과 구매가 이루어지는 유통의 단계에서만큼은 소비자들에게 허리를 굽히거나 굽히는 척할 수밖에 없다. 적은 화폐만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나 중산층 시민이라고 해도 상품을 구매하는 순간만큼은 지불하는 화폐에 대응하여 ‘유사 갑’ 대우를 받는 게 가능하다. 추측하건데,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내가 돈을 냈는데도 이렇게밖에 못 해주느냐”는 식의 투철한(!) 소비자 권리의식 근저에는 구조적인 소외와 그에 대한 무의식적 보상심리가 작동하고 있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

‘호갱’과 ‘손놈’ 사이

그렇게 ‘우리 안의 갑질’에 대한 의혹은 우리 사회의 소비자주권의식으로 향한다. 그것은 주로 서비스부문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발동되고, 적지 않은 확률로 갑질로까지 연결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소비자들의 위신은 강고하고 범접할 수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호구’와 ‘고객’을 합쳐 만들어진 ‘호갱’이라는 신조어가 갑질을 일삼는 소비자를 일컫는 ‘손놈’보다도 훨씬 큰 공감을 얻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경쟁이 될 만한 상품을 생산할 중소기업들의 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몇몇 대기업끼리 사실상의 담합으로 독점가격을 형성하며, 정경유착을 통해 소비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제도와 판결, 행정조치를 유도·온존·강화하는 독과점 대자본들의 횡포에 대해 한국사회의 소비자주권은 마냥 무기력하기만 하다. 기껏해야 일부가 철저한 정보수집과 발품을 결합하거나 해외직구와 같은 자구책을 통해 개별적인 저항만을 거듭할 뿐이다.

나는 이처럼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마냥 드리워진 독점자본들의 횡포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야말로 구매의 순간에 노동자, 자영업자들을 상대로 발현되는 ‘유사 갑’ 심리의 근원은 아닐까 의심한다. 눈앞의 상대적 약자를 향해 조현아처럼 행동할 것을 충동질하는 뒤틀린 보상심리가 무수한 ‘을’들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비자주권은 물론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편짜리에 머무를 때, 생산관계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反독점의식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국가생활 전반에 걸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감으로 승화되지 못할 때 그것은 자칫 병리적인 것으로 전화될 위험 또한 내포하고 있다. 이제 ‘우리 안의 조현아’를 돌아볼 시점이다.

  • 빨래통

    잘 읽었습니다. 항상 을로서만 살아온 설움에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또 다른 을에게 유사 갑질이라도 해보려는 심리를 잘 설명해주셔서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 dkk

    잘읽었습니다 ^^

본 글은 뉴스타파 블로그를 통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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