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체제 구조개혁을 위한 시론

‘구조 개혁(Structural Reform)’ –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단어는 본래 서유럽 좌파들을 비롯한 노동운동 진영이 즐겨 사용해온 것이었다. 노동과 자본의 힘 관계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집단적 힘을 키워주는 방식의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시스템 전체의 변화를 도모하는 방식이다.

그냥 개혁이 아니라 구조개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의미가 남다르다. 보통의 개혁 요구와 달리 구조개혁 요구의 경우 이것이 달성되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개혁 요구가 뒤따라오게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높은 수준의 요구가 이어짐으로써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바꾸도록 안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1만 원> 요구의 경우, 겉으로만 보면 법정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라는 단순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이 문제를 둘러싸고 수많은 사회적 쟁점이 형성된다. 영세자영업자와 소상공인(지불능력 부족한 자본가) 문제, 최저임금 인상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거냐, 최저임금은 생계비와 연동되어야 하냐…

생계비와 연동되어야 한다면 최저임금을 높이는 효과는 무상의료·무상교육·무상주거와 같은 복지 정책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이들 정책이 실질 생계비를 대폭 낮추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즉, 최저임금 대폭 인상 요구는 이렇게 수많은 사회적 토론 거리와 함께 더 높은 요구를 제기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구조개혁 요구의 목록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의 언어를 베낀 박근혜 정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단어가 정부와 자본의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노동시장 구조개혁’이다. 단어만이 아니라 여기에 담긴 철학까지 그대로 베꼈다. 즉, 박근혜 정권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은 이들 정책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노동의 집단적 힘을 약화하는 자본의 요구가 꼬리를 물도록 이어지게끔 설계되어 있다.

청년 일자리를 위해 장년·노년 노동자가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는, 조만간 장년·노년층이 양보했으니 청년층도 눈높이를 낮춰서 정규직만 고집하지 말라는 논리로 이어질 것이다. 임금피크제 시행을 위해 취업규칙 변경 절차를 완화하자는 논리는, 머지않아 임금·고용·복지 등 전반적인 노동조건 악화를 위해서도 동원될 것임이 틀림없다. 이 때문에 노동계에선 이 정책을 ‘노동시장 구조개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노동과 좌파의 색깔이었던 빨간색을 새누리당의 색깔로 과감하게 차용했던 박근혜 대통령, 이제 언어와 철학까지 베껴갈 셈인가?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애초부터 노동과 좌파의 언어였다면 왜 우리는 구조개혁의 철학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예를 들어 박근혜 정권과 자본은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이름으로 임금피크제를 비롯한 임금삭감을 들고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먹고사는 유일한 원천인 임금을 삭감하자는 얘기를 이토록 쉽게 하는데, 이 사회에서 가장 많은 부를 영위하고 있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삭감하자는 얘기를 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정규직들의 고임금? 멀리 갈 것도 없이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 연봉이 얼마인지 계산해보자. 현대차에서 57억, 모비스에서 42억, 현대제철에서 115억, 합계 215억 7천만 원의 연봉을 받는다. 어디 그뿐인가? 올해 초 정몽구 회장이 가진 주식에 대한 배당금으로 현금 742억을 챙겼다. 연봉과 배당금만 합해도 1천억에 육박한다. 이 돈이면 비정규직 노동자 1만 명에게 천만 원씩 줄 수 있는 돈인데, 왜 정부는 이런 고소득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까?

임금체계가 아니라 이윤체계 개편을, 임금피크제가 아니라 이윤피크제를!

그래서 한번 정리해 보기로 했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아니라 재벌체제 구조개혁을 한번 얘기해보자는 것이다. 10대 재벌 사내유보금만 500조를 훌쩍 넘긴 상태에서 가장 먼저 희생해야 할 대상은 재벌들임이 마땅하니 말이다.

박근혜 정부가 좌파와 노동의 언어와 철학을 베껴 썼듯이, 재벌체제 구조개혁 문제를 정리할 때에도 노동시장 구조개혁에서 정부가 사용한 논리를 베껴서 써보도록 하겠다. 이 방안이야말로 정규직·비정규직의 상생, 대기업·중소기업의 상생, 청년·장년의 상생 방안이 아닐까.

★ 이윤체계 개편
–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는 너무 많은 이윤을 내는 기업과 세금조차 못 내는 기업으로 나뉘는 등 ‘이중구조’가 되어 있음.
– 너무 많은 이윤을 내는 기업의 이윤을 대폭 삭감해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의 저임금 대폭 인상에 사용.

★ 이윤피크제 도입
– 일정 수준의 이윤율 이상을 넘어서는 기업의 이윤을 세금으로 확보하는 방식으로 이윤피크제 도입.
– 이윤피크제를 통해 확보된 재원으로 우선 공공부문부터 청년들을 대거 정규직으로 채용.
– 지난해 최경환 부총리가 기업소득 환류세제를 얘기하며 사내유보금 과세 정책을 얘기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이 정책은 전혀 추진되지 않고 있음.
– 넘쳐나는 재벌의 사내유보금, 생산적 부문에 재투자되지 않는 자본금에 대해 50% 중과세를 통해 청년·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

★ 단체협약 변경 가이드라인 제정
– 노동조합이 자기 조합원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보다 열악한 처지의 이익을 위해 단체협약을 변경하려는 경우,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가이드라인 제정.
– 이런 요구에 자본이 응하지 않을 경우 해당 노조에 쟁의권 부여 적극 검토.

정규직 고임금을 좀 깎아서 청년 고용 늘리자고? 수백 수천조에 달하는 재벌들 이윤과 사내유보금 깎아서 저임금 비정규직 고용보장과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 사용하는 게 더 쉽고 빠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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