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규칙 변경’ 왜 ‘일반해고’보다 앞서하나

비정규직법 논의를 마치는 즉시 취업규칙 변경, 근로계약(일반해고) 순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취업규칙의 경우 정부 지침안을 준비해서 바로 논의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고, 근로계약해지 부분은 전문가협의 등 더 준비해서 정부 초안을 만들어 논의하겠다.

이기권 고용노동부장관이 지난 10월 26일,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정부 노동개악 추진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정부는 11월 중순까지 노사정위에서 비정규직법 개악을 위한 노사정 2차 야합을 마친 뒤 국회 논의를 밀어붙일 예정이다. 아울러 그 즉시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과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을 순차적으로 논의해 발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용을 뜯어보면 좀 이상한 대목이 있다.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은 정부가 지침안을 만들어서 곧바로 논의한다는 것인 반면, 일반해고(근로계약해지) 가이드라인은 좀 더 준비해서 초안을 만든다는 것. 아니,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악의 핵심이 일반해고 도입 아니던가. 그런데 이게 가장 뒤로 밀린다고? 주인공은 항상 무대의 마지막에 서는 법인가.

쉬운 취업규칙 변경이 곧 일반해고 도입!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부와 자본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해낼 수 있다. 우선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이 발표된다고 해서 사업장마다 일반해고를 도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은 저성과자를 해고하기 위한 기준과 절차를 말 그대로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할 뿐이다.

실제 사업장에서 일반해고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취업규칙 또는 단체협약에 최소한의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저성과자 해고 조항을 단체협약에 넣도록 합의하는 정신 나간 노동조합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취업규칙에 근거 조항을 넣어야 하는데, 여기에 가장 필요한 지침이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이다.

즉, 사용자가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얻지 않고도 취업규칙에 저성과자 해고 조항을 넣을 수 있도록 취업규칙 변경을 위한 규제를 푸는 것이 가이드라인의 핵심 취지이기 때문이다. ‘사회 통념상 합리성’만 있다면 얼마든지 사용자 마음대로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그놈의 거룩한 ‘사회 통념상 합리성’은 누가 판단하는가?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할 경우 여기에 다툼이 생기면 이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대법원의 몫이 된다. 그렇다면 대법원이 판단하기 전까지는? 그렇다. 어차피 대법원 판결까지 최소한 4~5년 걸리니까 사용자들은 자기 멋대로 취업규칙에 저성과자 해고 조항을 넣을 것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정부와 자본 입장에서는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이 급한 게 아니다. ‘저성과자 해고’ 조항을 취업규칙에 명시하기만 하면 일반해고는 자동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취업규칙 변경 요건을 완화하는 것 자체가 일반해고를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따라서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 발표가 곧 일반해고 가이드라인 발표를 의미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취업규칙 맘대로 바꿔놓고 불이익 변경 아니라고 오리발

이미 서울대병원에서 우려했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을 위해 직원들에게 강제로 개별 동의를 위한 투표를 시행했으나, 직원 6,045명 중 3,177명(52.56%)이 투표해 고작 1,728명(28.59%)만이 찬성 의사를 밝혔다. 취업규칙을 적용받는 전 직원의 과반수 동의를 받지 못했으므로 취업규칙 변경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병원은 10월 29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임금피크제 도입 취업규칙 변경을 일방적으로 의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연장하되 1년차(59세)엔 20%, 2년차(60세)엔 30% 감액하는 것이다.

기획재정부 차관, 교육부 차관, 보건복지부 차관이 이사로 있는 이사회가 불법 논란을 감수하고 이를 강행한 배경은, 정년이 연장되는 대신 임금이 삭감되는 것이므로 임금피크제 시행이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이 아니라는 억지 논리이다.

이거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병원 측은 “임금피크제 실시가 불이익 변경이니 동의를 해달라”며 투표를 시행했는데 말이다. 바둑판에 앉아 승부를 가리기로 해놓고, 패하고 나서는 바둑판을 뒤집고 애초부터 바둑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 자체가 틀려먹었다며 자기가 이겼다고 말하는 꼴이다.

아니, 정년이 연장되는 대신 임금이 삭감되는 게 불이익 변경이 아니라면, 임금을 모조리 깎아도 불이익 변경이 아니란 말인가? 도대체 어느 정도 삭감까지 불이익 변경이 아닌 것인가? 그리고 이걸 대체 누가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가이드라인 도입 이전에 사업장부터 공격 시작

최근 일부 교육청에서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연 2회(2월, 8월) 근무성적 평가를 하도록 하고, 5개의 등급으로 분류하도록 하는 취업규칙 변경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근무성적 평가결과 3회 연속 최하위등급(불량)을 받은 경우 해고할 수 있도록 한다니, 이거야말로 저성과자 해고 아니 일반해고 제도의 도입이 아닌가!

KB손해보험, 현대라이프, 대신증권 등 금융권에서는 성과 관리 프로그램 또는 잉여인력을 이유로 퇴출 작전이 펼쳐지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에서도 역량향상(PIP)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사무직·연구직에 대한 퇴출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비정규법 개악을 위한 노사정 야합을 11월 중순까지 마친 후, 곧바로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 논의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니, 빠르면 11월 말 또는 12월 초에 발표되는 것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취업규칙 변경을 쉽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일반해고 도입 그 자체이다. 취업규칙 가이드라인 문제에 노동자 전체가 긴장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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