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념상 합리성만 있으면 취업규칙 맘대로 변경?

노동조합은 무력화되고 단체협약은 휴지조각이 된다.

한편 최근 서울대병원 사례를 보면, 정년 60세 및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현장 갈등 예방을 위해 취업규칙 변경 기준과 절차의 불확실성 해소가 필요하다는 점 확인
– 그간 취업규칙 지침은 여러 차례 토론회, 공청회 등을 통해 공론화가 마무리 단계에 있음
– 노사정위에서 비정규직 논의가 일단락되면, 관련 내용 논의에 바로 착수하여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확정,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 주기 바람.

지난 11월 9일, 이기권 장관이 고용노동부 확대정책점검회의에서 내뱉은 말이다. 장관이 언급한 서울대병원 사례가 뭘까? 사실은 사례라고 말하기엔 너무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해 취업 규칙을 변경하려고 노동조합을 무시한 채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것이다. 하지만 병원의 희망사항과 달리 직원 6,045명 중 3,177명(52.56%) 투표한 결과 고작 1,728명(28.59%)만이 취업규칙 변경에 찬성했다.

본래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시에는 노조의 동의를 구하거나 취업규칙 적용받는 전체 직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취업규칙 변경 시도는 부결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지난달 29일, 서울대병원은 임시 이사회를 열고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을 일방적으로 의결하게 된다.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임에는 틀림없지만 …

이렇게 일방적으로 의결할 거면 도대체 왜 투표를 실시한 걸까? 근로기준법은 취업규칙을 변경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들에게 불이익한 변경이 이뤄질 때에는 노조의 동의를 구하거나 전체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럼 임금피크제는 취업규칙의 불이익변경에 해당할까? 이 문제에 대해 일부 세력들은 임금이 깎이는 대신 정년이 연장되므로 불이익변경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정년 연장은 사업주가 해준 것이 아니라 법률(“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에 의해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 삭감과 정년 연장을 동일한 근로조건으로 보아 비교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서울대병원도 임금피크제는 불이익변경이라 보아 투표를 실시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고용노동부 역시 이러한 이유로 임금피크제 실시는 근로조건 불이익변경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사회통념상 합리성은 도깨비 방망이

그런데 정부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취업규칙 변경에 관한 지침(가이드라인)’ 내용의 핵심이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맨 앞에 이기권 장관의 발언을 보더라도 서울대병원과 같은 사례가 바로 취업규칙 관련 지침 뼈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의 논리는 이거다. 그래, 불이익변경이 맞다. 하지만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면 불이익변경도 사용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임금체계 개편과 취업규칙 변경 공청회(5.28) 고용노동부 발제문

- 고용안정, 신규일자리 창출 여력 확보, 인건비 부담과 조화 등 개별기업의 사정과 전체적인 노동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 필요성이 인정될 여지가 있음
– 임금피크제 적용 연령, 변경 후의 임금 수준이 비슷한 규모의 다른 기업 또는 사회 일반적인 임금수준과 비교하여 낮지 않은 경우에는 상당성이 인정될 수 있음
– 특히, 합리적 수준의 금액을 일정시점부터 단계적으로 감액하여 근로자가 일시에 임금 감소에 따른 생활상의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경우에는 해당 취업규칙 변경 내용이 일응 상당하다고 볼 수 있음
근로자 또는 노동조합 측에서, 사용자가 임금체계 개편을 위해 상당한 수준의 협의 노력을 하였으나 대안 제시도 없이 논의를 거부하는 등 동의권한을 남용한 경우에는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인정할 수 있음

위 내용은 올해 5월 28일 노동연구원 주최로 열릴 예정이었던 취업규칙 변경 지침 관련 토론회에 제출한 고용노동부의 발제문 중 일부이다. (당일 토론회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간부들의 강력한 항의로 열리지 못한 바 있다.)

임금피크제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임에는 틀림없지만 여러 사정을 감안하면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인정할 수 있기에 사용자 맘대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을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합리적 수준’의 임금삭감을 하고 ‘생활상의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경우에는 노동자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니, 이런 추상적인 얘기 몇 마디 해놓고 취업규칙 변경 권한을 사용자에게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용자들은 앞으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을 자기 멋대로 한 뒤에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라고 주장할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노조가 “대안 제시도 없이 논의를 거부하는 등 동의권한을 남용”한 경우에는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여, 노동조합이 집단적 거부투쟁을 벌일 권리조차 부정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단체협약은 휴지조각이 되고 노동조합은 무력화될 것임에 틀림없다.

성과 임금제 도입은 아예 불이익변경으로도 안 본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부가 그나마 임금피크제는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으로 보지만, 성과를 매겨 임금을 차등 지급하는 성과 임금제 도입은 아예 불이익변경으로조차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과 임금제를 도입하면 어떤 노동자는 임금이 깎이겠지만 어떤 노동자는 상승할 수 있다는 이유이다.

- 정년 60세에 따라 고령자 적합 업무 등 다른 업무로 전환을 규정한 경우에 단순히 임금 삭감 목적으로 새로운 직군 또는 직무를 신설하여 일률적으로 배치전환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이익변경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움
사업주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를 도입하는 등 임금 지급방식이나 임금체계 자체를 변경하는 것은 사용자의 경영 판단에 관한 사항으로 인력운용의 효율성 및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그 자체로는 원칙적으로 근로조건의 불이익 변경으로 볼 수 없음

위 내용은 마찬가지로 5월 28일 토론회에 제출한 고용노동부의 발제문 중 일부이다. 성과 임금제 도입은 거룩한 ‘경영권’에 해당하니 건드리지 말라는 것. 아니, 헌법에 보장된 노동조합의 집단적 거부투쟁의 권리는 맘대로 부정하면서, 헌법에 명함조차 내밀지 못한 경영권은 이렇게 보호한다는 말인가?

정부가 추진하는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은 한마디로 말해 사용자에게 노동조합 문 닫을 권리, 단체협약 무시할 권리를 보장하는 지침이다. 온힘을 다해 막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1987년 이전의 세상을 다시 구경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무노조 세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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