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는 없다!

5월 7일. 영국은 총선을 치른다. 국회의원 자리 650개를 놓고 정당 간 자리다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중 제일 많은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이 집권하게 되고, 그 정당의 대표가 총리가 되어 대통령에 해당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니 영국에서의 총선은 곧 대선을 의미한다.

지난 총선은 2010년에 있었다. 토니 블레어 이후 13년간 영국을 이끌었던 노동당은 258석을 차지했다. 예정된 패배였다. 반면 보수당은 306석을 차지했다. 최대 의석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을 했으나 과반 의석인 325개에는 미치지 못했다. 절반의 지지도 받지 못한 정당이 국정을 이양받아 정국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런 정국을 일컬어 ‘헝 의회 (Hung Parliament)’라 한다. 의회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처럼 불안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말이다. ‘헝 의회’를 타개할 묘안이 필요했다.

보수당을 이끌던 젊은 기수, 데이비드 카메룬은 주저 없이 만년 3등 정당, 자민당 (Liberal Democrats)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민당은 깜짝 등장한 정치 신인 닉 클레그의 활약에 ‘큰 기대’를 했다가 ‘좌절’의 쓴맛을 다시는 중이었다. 기존 의석보다도 5석이나 적은, 57개 의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자민당은 보수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닉 클레그는 부총리가 되었고, 데이비드 카메룬은 총리가 되었다. ‘연립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보수당의 대표로 총리 자리에 오른 데이비드 카메룬은 45세, 자민당의 대표로 부총리 자리에 오른 닉 클레그는 44세였다.

데이비드 카메룬 영연방 총리(보수당.왼쪽)과 닉 클레그 부총리(자민당.오른쪽)
▲ 데이비드 카메룬 영연방 총리(보수당.왼쪽)과 닉 클레그 부총리(자민당.오른쪽)

2010년 총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유는 이렇다. 영국은 “양당체제다”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100여 년, 보수당과 노동당, 두 정당이 번갈아 가면서 집권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영국엔 수많은 군소정당이 있다. 앞서 언급한 자민당 (Liberal Democrats) 외에도, 스코틀랜드 국민당 (Scottish National Party), 녹색당 (Green Party), 존중당 (Respect Party), 신페인당 (Sinn Fein), 영국 독립당 (UKIP) 등등. 이들 정당 중엔 의원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정당도, 극우 파시스트 혹은 인종차별주의 집단이라고 비난을 받는 정당도 있다. 이들 군소정당은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존재감 없이 ‘존재’해 왔다. 정치판의 병풍처럼 무려 100여 년 동안 말이다.

그런데 지난 총선에서 보수당 vs 노동당의 양당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표심이 특정 정당으로 쏠리지 않고 고루 나누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3등만 하던 자민당은 보수당의 러브콜에 응하면서 집권당이 되었다. 이제 거대정당도 작은 정당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 다수당의 횡포는 사라지고 소수당의 목소리도 당당해질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화합’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극단적 우파정당으로 비난을 받아온 영국독립당 (UKIP)의 약진이 최대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 독립당은 지난해 있었던 유럽의회 선거에서 영국에 할당된 총 73석 (유럽 전체 751석) 중 24석을 차지해 노동당 (20석)과 보수당 (19석)을 앞서며 들러리, 장식용 병풍 정당으로서의 설움을 씻어냈다.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정당이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한 것은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아이러니’가 아니었다. 민심이 영국 독립당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독립당은 지난해 말 시행된 두 차례의 보궐선거에서도 연달아 의원을 배출, 국회진출에 성공했다. 이제 겨우 2명의 국회의원을 가지고 있지만, 영국 독립당의 지지율은 3위를 달리고 있다. 최근의 지지율 (BBC 여론조사)을 보면 자민당보다 두 배 가까운 격차로 앞서고 있다. 영국 독립당의 당수 나이젤 파라지는 늘 화제를 몰고 다니는 괴짜다. 그는 이제 겨우 50살이다.

나이젤 파라지 영국독립당(UKIP) 당수
▲ 나이젤 파라지 영국독립당(UKIP) 당수

지난해 9월 독립투표 이후 스코틀랜드는 준 독립국의 위상을 확보했다. 비록 독립에는 실패했지만, 국민적 신뢰를 확고하게 쌓는 데는 성공한 스코틀랜드 국민당 (Scottish National Party)의 지지율은 콘크리트다. 적어도 스코틀랜드에서만큼은 대적할 정당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리더 니콜라 스터전 (Nicola Sturgeon)은 1970년생으로 올해 46세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영국의 정당들은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과 같다. 상표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21세기형 선거공약은 정당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모든 정당의 지표는 하나로 모인 듯 보인다. 바로 표심이다. 표심이 정당의 정체성이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노동자가 보수당에 표를 던지고, 고학력 고소득 계층이 노동당에 표를 던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2010년 보수당은 거의 모든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표를 받았다. 비정규직과 장기 실직자의 31%도 보수당에 표를 주었다.

2015년, 올해의 선거에서는 전체 의석의 절반을 넘기는 정당이 탄생할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시대는 ‘양당체제’를 넘어 ‘다당체제’로 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의 특정 정당이 담아내기는 불가능할 만큼 다양하고 자유로워졌다. 정당을 선택하는 기준도 나이, 지역, 정보, 이슈, 교육 그리고 소득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다르다. 물론 올해도 큰 틀에서는 보수당과 노동당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절대 지지’는 없을 것이며 군소정당의 약진이 두드러질 것이라는 예상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결국, 또 다른 ‘연정’이 탄생하리라는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영국의 ‘의원내각제’는 곧 ‘연정’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이제 국민의 생각과 요구를 평준화해 강제하는 ‘큰 힘’, ‘절대권력’, ‘대세’가 지배하던 시대는 가고 있다. 국민은 더는 ‘대세’에 따라 원치 않는 정당에 표를 주지 않는다. 아직 이렇게 말하는 게 섣부를 수도 있겠고, 시기상조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러 정당이 고르게 지지를 받고, 국민의 다양한 요구에 맞춤형으로, 유연하게 부응하는 ‘정당 평준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부족한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다른 생각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의견과 힘을 모으는 긍정적 의미의 ‘연정’이 이번 총선을 통해 다시 한 번 재연되기를 바란다.

데이비드 카메룬 현 총리는 오는 5월 7일 총선에서 보수당이 다시 집권하게 되더라도 자신은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언을 했다. 그러면서 보수당엔 자신을 대신할 쟁쟁한 선수들이 많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테레사 메이는 58세의 여성이고, 재무장관 조지 오스본은 43세, 현 런던시장 보리스 존슨은 50세다. 나는 앞서 여러 정당의 이름과 당 대표들의 나이를 언급했다. 대부분 40대다. 대한민국 정치판과 비교해 보면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다. 그러나 40대가 이끄는 영국의 정치판은 충분히 성숙하고, 세련되다. 그들이 이끄는 국정은 거침이 없고, 창의적이기까지 하다.

경험과 연륜으로 무장한 노장들의 과욕이 대한민국의 정치를 낡고 부패한 과거에 묶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 그만 떠날 사람 떠났으면 좋겠다. 피는 거두어 가시라 국민의 숫자만큼 꽃을 심어야 할 때이니.

  • 장정훈

    정정합니다. 데이비드 카메룬은 이번 5월 7일 총선이 아니라 다음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를 하더라도 총리자리에 머물지 않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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