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청년, 늙은 좌파에 빠지다

의도적이지 않으나 튀는 사람이다.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생각하는 것으로 보나.

45세의 안디 번함, 46세의 예티 쿠퍼, 44세의 루이스 켄달. 모두 40대. 모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 모두 장관 혹은 그에 준하는 주요 보직을 거친 인물. 그리고 중도 보수.

그 대척점에 선 사람, 제레미 코빈. 66세. 기술대학 중퇴. 장관은커녕 당내에서 관심조차 받아본 적이 없는 미운 오리새끼. 극좌파로 분류된 인물.

오는 9월 10일, 영국의 제1 야당, 노동당이 새대표를 뽑는다. 그런데 그 경선 열기가 대선 못지않게 뜨겁다.

후보는 앞서 언급한 4명. 그중 선두는 제레미 코빈. 2등과의 격차가 제법 크다.

제레미 코빈은 런던의 달동네, 이슬링턴에서 32년째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는 인물이다.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그는 주로 듣는 편이다. 늘 바쁘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지역 민심을 살핀다. 그 성실함의 결과로 지역 내에서 그의 인기는 ‘절대’적이다. 자그마치 8선에 이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노동당 내에서 그는 ‘아웃사이더’ 혹은 ‘왕따’에 가깝다.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당내 주류들과 친하지 않다. 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주류 세력의 적’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노동당 집권 시기 10년간 총리를 지낸 토니 블레어와는 막역한(?) 원수지간이다. 그는 노동당 집권 시절 당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마다 반대표를 투척했고 그 횟수는 무려 500번이 넘었다. ‘왕따’를 넘어 ‘내부의 적’으로 보아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는 인물도 아니다. 연설이 뛰어난 것도, 외모에서 카리스마가 넘치는 것도 아닌 그는 그저 ‘조용한 반골’이였다.

그가 자신의 정당에 그토록 ‘적대적’인 이유, 그가 32년간 지켜온 ‘조용한 반골정신’을 깨고 당 대표 경선에 전격적으로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당의 가치는 사라졌다. 그 사라진 가치를 살려내겠다

코빈의 문제의식은 정당하다. 지난 세월, 노동당은 ‘집권’만을 목표로 질주했다. 보수당과의 차별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토니 블레어를 비롯해 수많은 노동당 내 주류 인사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노동당’을 기치로 ‘낡은 좌파 공약’의 폐기를 주장했다. ‘자기부정’이 도를 넘어 도대체 노동당과 보수당의 차이를 구별해 내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에 맞서 좌파정당으로써의 선명성을 선언하고 나선 제레미 코빈에 대한 당내 공격은 가히 집단폭행 수준이다. 토니 블레어는 “코빈은 절대로 보수당을 이길 수 없고 오히려 노동당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며 맹공격하고 있다. 어떤 이는 “그는 전혀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깎아 내리고 어떤 이는 “코빈을 지지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 하고, 어떤 이는 “지금 당원들이 비현실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며 개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레미 코빈의 인기는 가히 신드롬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무엇보다 20만 명이던 노동당 당원 숫자가 30만 명에 가까워졌다. 당 안팎에선 신규 등록자의 대부분을 코빈 지지자로 보고 있다. 코빈의 선거운동을 돕는 자원봉사자도 지난 29일 기준, 1만 5천 명, 평균 4만 원씩의 소액 기부로 모인 기부금도 3억 3천 만원에 달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의 유세 토론회는 전회 매진을 기록하고 있고 말이다.

이쯤에서 ‘코빈의 인기비결’이 되고있는 ‘코빈의 생각’을 몇가지만 나열해 보겠다.

“노동당 집권 시기에 불법적으로 저질렀던 이라크전에 대해 사과하겠다.”

“긴축을 중단하고 민영화된 철도, 에너지 등을 다시 국유화하겠다.”

“기업 경영진의 급여가 너무 높다. 나는 모든 조직의 급여 차이를 주시하고 있다.”

“내가 당수가 되면 금융계 임원들이 먼저 긴장을 해야 할 것이다.”

“기업에 안겨 주었던 세금감면이나 보조금을 삭감하겠다.”

“부유세를 대폭 인상하고, 최저 임금 인상, 대학 등 고등교육 무상화를 추진하겠다.”

“정부는 폐쇄적인 엘리트 집단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 수를 늘리겠다.”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동소유를 규정했던 노동당 헌장 4조를 부활시키겠다.”

“언론 산업의 소유구조를 개선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

“NHS (전국민 무상의료 서비스)를 사수하겠다.”

그는 또 국왕제도의 폐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 반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등도 주장하고 있다.

노동당이 보수화되면서 보수당의 정책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반기를 든 사람들은 기댈 곳을 잃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 앞에 제레미 코빈이 나타났다. 그가 깃발을 들겠다고 나서자 ‘희망’을 보았다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최근에는 영국 대학의 경제학자들까지 공개적으로 코빈의 경제정책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특히 청장년층이 비슷한 세대인 40대 후보들을 외면하고 70이 가까운 늙은 좌파, 코빈에 열광하고 있다.

오는 10일 코빈이 당내 주류의 견제를 따돌리고 당 대표로 선택받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노동당’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선명성을 되찾고, 99% 국민들과 함께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야당다운 야당의 모습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노장의 건투’를 빈다.


각주 : 영국은행 전 고문을 포함한 60여 명의 경제학자가 가디언 등 언론을 통해 코빈의 정책에 지지를 표명하자 55명의 경제학자가 파이낸셜 타임즈 (FT)에 코빈의 정책에 우려를 표하는 서한을 보냄으로써 코빈의 경제정책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 yang hun

    타산지석인 듯 합니다.

  • bob

    브라보
    나도 후원하고 싶어요.

  • 영국 노동당과 란국 노동당의 상황을 같다고보는 것은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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