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 이상헌 박사, 피케티를 말하다

스위스 제네바에는 유엔 산하의 국제기구 ILO가 있다. 우리말로 하자면 <국제노동기구>다.

그 국제기구에서 <부사무총장 정책특보>라는 다소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이상헌 경제학 박사다.

문학을 꿈꾸던 사람답게 말도, 글도 맛깔스럽고 세련되게 구사하는 능력을 갖춘 이다.

‘경제’라는 무거운 주제도 그가 말하면 잘 쓰인 수필처럼 편안하게 쏙쏙 들어온다.

이 글이 재미가 없다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필자의 한계다.


국제기구라서 그렇겠지만, 그가 근무하는 ILO 건물은 참 크다. 고래 등 같은 건물 입구에서 출입증을 받아 드넓은 로비를 가로질러 몇 층인가로 올라간 다음, 꽤 긴 복도를 지나야 그의 연구실을 찾을 수 있다. 통 큰 유리창을 통해 목초지가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는 단정한 연구실이다. 지난번 방문 때는 그 초지 위로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이상헌 박사를 찾아간 이유는 요즘 한참 화제가 되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통해 오늘날의 경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참고로 나는 피케티의 책을 읽지 않았다. 경제학 서적이고 그것도 꽤 두껍다는 말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해 버렸다. 피케티에게는 미안한 말 일수 있지만 나는 이상헌 박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그의 책에 대한 관심을 갈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대작이다”

이상헌 박사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한마디로 대작’이라고 했다. 무려 20개 이상의 나라에 걸쳐 300년간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 분석한 책이기 때문이다. 분석의 결과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해하고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을 불편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상헌 박사는 ‘깔끔한 분석’이라고 표현했고 나는 “경제학의 <불편한 진실>쯤 되겠군.”이라고 받아들였다.

“경제학계에서 분배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어요. ‘성장’을 운전석에 두고 ‘소득분배’는 뒷좌석에나 던져두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죠. 피케티는 방대한 자료 분석을 통해서 ‘소득분배’가 경제의 가장 핵심문제라는 걸 설득력 있게 보여준 인물입니다.”

이상헌 박사가 <21세기 자본>에서 인상적으로 주목한 부분은 책의 시작, 그러니까 1장이었다. 토마 피케티가 프랑스의 인권선언 1조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정도만 인용하는데 피케티는 그다음 문장인 ‘사회적 차별은 공공선에 입각할 때만 정당화된다’는 구절을 인용했어요. 오늘날의 소득불평등이 인권선언에서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었고,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 인권문제로 고민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보여준 거죠”

피케티는 천재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는 1971년생으로 아직은 젊은 나이다 (최소한 필자보다는 젊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공부하고 겨우 22세의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0대 중반에 미국 MIT로 초빙돼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는 그보다 어린 제자들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곧 미국 학계의 경향에 회의를 느끼고 모국인 프랑스로 돌아왔다. 지금은 파리경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상헌 박사는 <21세기 자본>의 핵심 내용을 3가지로 본다.

첫째, 불평등이 항상 증가할 수도 있다는 걸 통계로 보여줌으로써 “그래도 예전보다는 지금이 평등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편견이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둘째,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불평등은 더 심각해 질 것 이라는 비관적 미래를 경고하고 있다. 자본가의 수입은 3~4%로 안정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전체 경제는 성장률이 2%대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 경기가 나빠도 자본가는 꼬박꼬박, 더 많은 수입을 챙겨가고 있다는 것인데 자본가의 수입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지면 불평등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셋째, 현실성은 떨어지나 전 세계가 공조하는 자산세를 도입해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제적으로 자산의 이동이 자유로운 만큼 세금을 피해 자산을 이동시킬 수 없도록 국제사회가 공조해 자산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것.

이상헌 박사는 노동소득 분배율이 일정하다는 건 지난 수십 년간의 분석을 통해서 오래된 편견으로 밝혀졌다며 노동소득 분배율은 일정하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나라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2차 세계대전 후 노동소득이 올라가고 자본소득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분배율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그 시기를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소득이 내려가고 자본소득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영국의 ‘대처주의’와 미국의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변화였다. 특히 금융과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 완화는 분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2007년 경제위기로 반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건 그냥 기대였을 뿐 노동소득은 계속 떨어지고 자본소득은 계속 상승 중이다.

“느끼시겠지만 실물경제는 안 좋지만 주식시장은 좋잖아요. 일반 노동자는 힘들지만, 최고 연봉자들은 괜찮지요. 자본소득도 많은 편이고요. 이런 현상이 피케티의 분석이 맞는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겁니다. 피케티는 소득불평등이 과거에도 악화추세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우리 ILO의 데이터를 봐도 그렇게 나오거든요. 1999년을 기점으로 노동생산성과 임금상승률을 비교해 보니까 생산성은 높아지는데 임금은 정체상태예요. 이 둘 사이에 차이가 바로 자본가의 소득으로 돌아가는 건데 그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죠”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소득은 올라가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소득은 줄어드는 이유에 대해서 경제학자들은 기술의 발달과 교육으로 인한 숙련도의 향상 같은 걸 꼽는다. 기술이 발달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노동자들의 숙련도가 높아져서 적은 노동력으로도 높은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투자 대비 더 큰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상헌 박사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기술이나 숙련도의 변화는 역사적으로 전 기간을 통해서 진행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불평등이 심화돼온 8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와 비교적 평등했던 그 이전의 차이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정책은 무용하다는 결론에 빠지게 되죠. 기술의 발달이 한 요인일 수는 있지만, 너무 중시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금융화정책으로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소득이 유리하게 돌아가게 되었고, 세계화 정책으로 기업이 싼 노동시장을 찾아 이동하는 현상도 생겼습니다. 기술, 금융화, 세계화가 노동력을 가진 사람들의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셈이죠. 비정규직이 생겨나고, 복지는 축소되고 하니까 임금협상을 위한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더 약화되고 자본가의 임금결정권은 우위에 서게 된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파업에 비정규직으로 대응하고, 복지의 부재로 기댈 곳 없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자본가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이상헌 박사는 정책의 부재가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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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박사는 <21세기 자본>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 아주 맘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루즈벨트의 <뉴딜 프로그램>을 대규모 토목공사라고만 보는 건 편협한 시각이라면서 정책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 미국이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을 놓은 것이 <뉴딜프로그램>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루즈벨트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루즈벨트때 최저임금, 노동시간 규제, 아동노동금지, 노조결성과 임금협상의 틀이 마련됐어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세금제도와 사회정책을 포괄적으로 사용했죠. 최고연봉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루즈벨트 입니다. 오늘날의 가치로 따지면 100만불 이상을 받는 사람들은 그 이상의 수입에 대해서는 전액 세금으로 납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의회의 입법을 통해 88% 과세에 성공을 했죠. 그렇게 강력한 누진과세를 통해서 소득분배를 개선하는데 공헌한 인물이었고요. 피케티는 루즈벨트식의 정책적 개입 없이 불평등은 개선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낙수효과 (trickle-down effect), 소위 부자가 늘어나면 가난한 자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져 다 같이 잘살게 된다는 이론에 대한 이상헌 박사의 생각을 물었다. 그는 피케티는 낙수효과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낙수효과를 농담 정도로 생각할 거라고 말한다.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근거가 없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이상헌 박사는 낙수효과는 1990년대 성장기에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저소득층을 달래기 위해 정치적으로 만들어낸 용어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자본 (자본가의 수익)이 성장하면 투자가 늘고, 고용이 늘어 노동자의 소득이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설득력은 있으나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자본소득은 분명히 늘었는데 투자는 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1990년대 이후 투자비율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어요. 부자가 돈이 많아도 자본을 늘릴만한 요인이 없으면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자본가의 소득이 증가해도 노동자의 수입이 줄어들면 노동자, 즉 일반 국민은 쓸 돈이 없으니 구매력이 떨어지죠. 생산을 해도 판매가 안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건 기업이 더 잘 알아요. 그러니까 자본가는 돈이 많아도 투자를 하지 않는 겁니다. 투자를 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기업에 규제를 풀어주고, 특혜를 줘서 투자를 유도하겠다. 그래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역대 정권의 정책이 왜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대기업 특혜는 자본가의 주머니만 불려줄 뿐이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경제회복을 원한다면 소득불평등 문제 먼저 풀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헌 박사는 ‘복지는 생산’이라는 논리도 편다. 돈이 있어야 복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을 때 일수록 복지를 해야 사람들이 쓸 돈이 생기고 그래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직격탄을 맞아 폭삭 망했으면서도 복지정책만큼은 우직하게 지키면서 위기를 극복한 아이슬란드가 떠올랐다.

이상헌 박사의 말에 의하면 OECD나 IMF, 월드뱅크 (World Bank)는 2000년대 초만 해도 소득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소득불평등이 어느 정도 있어야 동기를 부여받아 더 열심히 일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봤다는 것. 그러나 6, 7년 전부터 분위는 바뀌기 시작했다. OECD는 소득불평등이 지나치게 커지면 경제성장률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IMF도 불평등이 높을수록 경제성장이 불안정해진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고 말이다. 소득 불평등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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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박사는 경제 정상화의 문제가 세금에만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생산성에 비해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가지 않고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로 지적하면서 임금이 적당한 수준이 되지 못하면 과세나 재분배 정책도 제한적일 수밖에없기 때문에 임금을 적정수준으로 올려서 노동시장을 정상화시키는정책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CEO의 연봉이 많은 건 당연하지만, 기여도에 비해 너무 많이 받아간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라며 토마 피케티가 지적하듯 공공선의 입장에서 정당화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꼬집는다.

이상헌 박사는 인터뷰 끝에 중요한 한 가지를 잊지 않았다.

“소득불평등은 결국 정치적 정책개선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50~70년대처럼 소득분배가 꽤 공평했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이후 불평등이 커지고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정치적으로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 낼 환경이 조성되지 않고 있기때문이에요. 그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상위 1%의 자본가들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자본가들은 소득이 늘어나면 그 돈으로 보트나 빌딩을 삿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치에 투자합니다. 상위 1%의 소득은 소득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힘이 되어 버렸죠. 정치가 상위 1%에 의해 포획 당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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