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언어에 침을 뱉어라

섬에 갔다. 스웨덴 고트랜드.

제주도 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인구는 5만7천 명. 제주도의 1/10도 안 된다.

제주도와 공통점? 섬 그리고 관광지.

출발 한 달 전 숙소를 예약했다. 운이 좋았다. 섬을 통틀어 딱 한곳에 방이 남아 있었다.

육지에서 뱃길로 3시간. 섬에서 가장 큰 도시 비스비(Visby)에 도착했다.

군사적으로 보면 발트 해의 전략요충지, 경제적으로 보면 제1의 관광지, 문화적으로 보면 잉그리드 베르히만 이라는 유명 영화감독의 고향이자 만화영화 ‘마녀 키키’의 배경이 되었던 곳. 그런데 휴가를 보내러 간 것은 아니었다. 물론 휴가지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비스비에서는 7월 3일부터 10일까지 ‘알메달렌 위크(Almedalen Week)’가 열리고 있었다. ‘알메달렌’이라는 공원을 중심으로 열리는 연중행사였다. 무슨 행사? 정치행사.

그렇다. 고트랜드는 섬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정치 행사로 배와 비행기, 숙박이 모두 동났다.

그 틈을 비집고 운 좋게 교통편과 숙박 편을 찾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고트랜드 상륙에 성공했다.

매년 3만 명이 넘는 일반인과 정치인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육지에서 배로 3시간 떨어진 섬을 찾아와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3000개가 넘는 토론에 참석하면서 사회/ 정치적 담론을 나눈다.
매년 3만 명이 넘는 일반인과 정치인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육지에서 배로 3시간 떨어진 섬을 찾아와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3000개가 넘는 토론에 참석하면서 사회/ 정치적 담론을 나눈다.

3.4킬로쯤 된다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마을은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행사 기간에만 3만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간다 했다. 뭐하러? 정치 세미나와 정치 토론을 즐기러. 일주일 남짓한 행사 기간 동안 도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세미나와 토론이 3천 개가 넘었다. 주제도 물론 3천 가지쯤 되는 거 같았다. 이민자 문제, 교육 문제, 치안 문제, 교통 문제, 동성애 문제, 남녀평등 문제, 보건 문제, 치안 문제, 외교 문제, 경제 문제, 에너지 문제, 환경 문제, 언론 문제, 과학 문제, 노동 문제, 임금 문제, 연금 문제, 인권 문제, 유럽연합 문제, 부정부패 문제 등등. 나열하자면 이글을 끝맺을 수 없다.

세미나와 토론을 준비하고, 참여하고, 즐기는 단체와 사람들도 주제만큼이나 다양했다. 정당과 정치인, 관료, 학자, 활동가, 로비스트, 기업인, 학생, 저널리스트 그리고 남녀노소를 망라한 일반인. 모든 행사는 무료.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불쑥 들어가 엿들을 수도 있고 즉석에서 끼어들어 토론에 참여할 수도 있다. 특히 정치인을 만나기가 쉽다. 행사장 구역 안에 설치된 정당 천막으로 찾아가서 만날 수도 있고,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궁금한 걸 묻고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도 있다. 하루에 한 정당씩 그날을 대표한다. 운이 좋았다. 필자가 어슬렁거리던 날이 집권당 “사회민주당의 날”이였다. 그래서 행사장을 찾은 총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어깨를 두드려 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서. 섬은 별천지였다. 정치 별천지.

약 9백 50만 명의 스웨덴을 이끄는 총리이자 사회민주당 당수 스테판 뢰벤(Stefan Löfven)도 참석해 자유롭게 정견을 발표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한다.
약 9백 50만 명의 스웨덴을 이끄는 총리이자 사회민주당 당수 스테판 뢰벤(Stefan Löfven)도 참석해 자유롭게 정견을 발표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한다.

행사장을 찾은 사람들의 상당수가 여행을 겸한 방문객이었다. 신선했다. ‘정치’가 여행의 기분을 잡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여행의 품격을 높여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영접했기 때문이었다. ‘알메달렌 위크’의 시작도 그러했다. 고트랜드는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사회민주당 대표로 총리를 지낸 올로프 팔메(Olof Palme)의 여름 휴양지였다. 그는 매년 가족 휴가를 고트랜드에서 보내면서 트럭에 올라 주민들을 상대로 연설하곤 했다. 팔메는 돌직구 스타일의 토론을 즐기던 좌파 총리였다. 미국과 러시아에 매우 비판적이던 그는 “혁명적 개혁주의자”로 불렸다. 개혁주의자답게 그는 스웨덴의 복지를 획기적으로 확대 개선해 국가를 선진국의 반열에 올렸다. 휴가를 보내면서 정치적 토론을 즐겼던 팔메를 따라 정치인들이 고틀랜드를 찾았다. 그리고 연설을 했다. ‘알메달렌 위크’는 그렇게 시작됐다.

웃음과 박수, 유머와 야유는 넘쳤으나 고성과 주먹다짐은 없었다. 미디어는 섬에서 생산되고 있는 따끈따끈한 정치 담론을 실시간으로 퍼 날랐다. 지성인의 사회는 이런 모습이구나. 한편 부럽고 한편 슬펐다. 배가 아파서.

아이들도 많았다. 열 살, 열한 살, 열두 살… 어른들의 토론에 아이도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에 어른들이 귀 기울였다. 십수 명의 아이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며 “부모의 휴가 기간을 방학 기간과 같게 해달라”고 소리쳤다. “돈에 대한 개념을 배우고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현금사용을 장려하라”고 주장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사회적인 이슈가 담긴 전단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일주일간의 행사내용이 정리된 무료 안내서를 배포하는 역할에도 어린아이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스웨덴의 아이들은 일찌감치 정치의 중요성, 권리, 주장하고 표현하고 소통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보고, 배운 아이들이 스웨덴이 됐구나.” 알게 됐다.

이제 열살을 갓 넘긴 아이들의 피켓시위. "우리 방학이 10주인데 엄마&아빠 휴가가 5주밖에 안되면 나머지 5주는 누가 우릴 돌봐주냐? 엄마 아빠 휴가를 10주로 늘려 달라" 고 외치며 피켓을 들고 가두행진을 하던 아이들.
이제 열 살을 갓 넘긴 아이들의 피켓시위. “우리 방학이 10주인데 엄마&아빠 휴가가 5주밖에 안 되면 나머지 5주는 누가 우릴 돌봐주냐? 엄마 아빠 휴가를 10주로 늘려 달라” 고 외치며 피켓을 들고 가두행진을 하던 아이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듣고 새긴 말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나서지 마라”, “어른들 세상에 관심 두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였다. 조금 커서 배운 건 “친한 사이일수록 정치 이야기는 삼가라” 였다. 스웨덴에서라면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언어들. 국민을 개돼지로 만들어 버린 그 언어에 침을 뱉고 싶다.

  • Jason

    왜 기사 제목이 그 언어에 침을 뱉고 싶다인지 다 읽고 나서 알았네요. 좋은기사입니다. ^^

  • J S Park

    국민을 개돼지로 취급한 것은 정권 만이 아닙니다. 뉴스타파도 그랬어요. 사드 관련 보도를 보시길.

    힌트를 드리자면 따옴표 장난(괌 배치 사드 성능검증없이 운용)과 엉터리 전문가 인터뷰(누구를 위한사드인가?)

본 글은 뉴스타파 블로그를 통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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