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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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처럼, 배우처럼, 도둑처럼

장정훈 프로필 사진 장정훈 2016년 10월 04일

독립 프로덕션 KBNE-UK 연출 및 촬영감독. 해외전문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하고, 한국 독립프로덕션과 방송사들의 유럽 취재/촬영/제작 대행 및 지원. The Land Of Iron 기획/연출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제보가 날아들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감독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거액의 현금을 챙기고 있다는 정보였다. 탐사보도팀이 움직였다. 기자들은 축구 에이전트 직원으로 감독들에게 접근했다. 접근 대상엔 국가대표팀 감독 앨러다이스도 포함됐다. 기자들의 연기는 뛰어났다. 앨러다이스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규정을 피해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을 영입하는 편법을 알려주고 거액의 수수료 (약 5억 7천만 원)를 요구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에이전트로 위장한 탐사 보도팀의 몰래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신문과 인터넷으로 전 국민에게 전달됐다. 앨러다이스 감독은 곧바로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를 내려놓았다. 감독 자리를 내려놓은 것으로 끝은 아닐 것이다. 부패가 드러난 이상 수사가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지난 10개월여의 취재를 통해 확보한 열 명이 넘는 프리미어 리그 감독들의 부패를 차례차례 공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영국 축구계의 부패를 폭로하는 시리즈가 시작된 것이다.


소위 언더커버 리포터라고 하는 영국 기자들의 위장, 잠입 취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신분을 속이거나 대리인을 고용하고, 몰래 잠입해서 취재하는 행위는 이미 오래된 방식이다.


2014년, BBC는 한 대형 요양원에 알렉스 리(Alex Lee)를 투입했다. 전형적인 위장취업이었다. 요양원에서 제공하는 트레이닝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근무가 시작됐다. 36번에 걸쳐 교대근무를 하는 동안 그녀의 몸에 부착된 몰래카메라는 요양원의 충격적인 실태를 기록하고 있었다. BBC는 그 실태를 <파노라마>를 통해 방송했다. 방송 후 요양원에서는 한 명이 해고되고 7명이 직위 해제됐다.


언더커버 리포트는 방송과 신문을 통틀어 차고도 넘친다. 경찰시험을 보고, 경찰 학교에 입교해 훈련을 받으면서 경찰들의 인권의식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BBC 프로그램. 공항의 허술한 보안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공항보안시설을 뚫고 비행기로 잠입한 기자. 가짜 이력서로 버킹엄 궁전에 위장 취업해 왕실의 허술한 신원확인 시스템과 보안 실태를 고발한 데일리 메일 기자 등.


2009년 BBC 스코틀랜드의 여성 기자가 지역 요양원에 취업해 노인학대 실태를 기록하다가 발각이 됐다. 그녀는 체포됐지만, 곧 풀려났다. 범죄의 의도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취재방식 자체를 범죄시하지 않는 단적인 예가 되겠다. 사람들은 오히려 취재방식을 문제 삼기보다는 취재를 통해 드러난 문제의식에 주목한다. 앞서 짧게 예로 든 경찰학교의 경우에도 영국 경찰 당국은 방송을 강행할 경우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BBC를 압박했다. 하지만 방송 후 경찰 9명이 파면됐을 뿐, BBC는 고발당하지 않았다.


영국은 언론사마다 몰래카메라(전화 녹취도 포함)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다. 모두 대동소이하다. 그중 채널4 (Channel 4)의 가이드라인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몰래카메라는 강력한 무기다. 부정부패를 잡아내는 유일한 수단일 수도 있다. 몰래카메라는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법을 바꾸며, 범죄자를 감옥으로 보내기도 한다.




사생활에 대한 권리는 공공의 이익이 더 클 때에 한해 침해받을 수 있다(The right to privacy can only be overridden where the public interest outweighs it).



물론 어느 언론사나 몰래카메라의 사용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엄격한 통제하에 이루어진다.


한국의 교정 당국이 취재방법을 이유로 SBS와 MBC, 독립 피디 등을 무더기로 고발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침입’ 등의 혐의란다. 그리고 몰래카메라로 재소자를 인터뷰한 게 문제란다. 영국에서라면 그런 명분으로 피디들을 고발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오히려 방송이 들추어낸 문제에 따라 교정 당국이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영국의 언론인들은 때로는 사기꾼처럼 신분을 속이고, 때로는 배우처럼 연기하며, 때로는 도둑처럼 잠입을 감수한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간 악의 소굴로 들어가 악행을 기록하기를 마다치 않는다. 거짓과 위선,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기 위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동원되는 취재방식은 그것이 최선이고, 유일한 방법인 한 언제나 정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