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슬픈 민낯

2014년 3월, BBC 파노라마는 21세기 영국의 모습을 이렇게 담고 있었다.

난방도 할수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고, 따듯한 음식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요

푸드뱅크 앞에서 BBC 취재진과 만난 스물일곱 살 청년 사이먼은 따듯한 식사 한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12월 10일 자 <더 가디언>의 한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푸드뱅크 앞에는 한 아빠와 아이들이 추위를 견디며 서 있었습니다. 40년간 건설노동자로 살아온 아빠는 푸드뱅크를 찾아오게 된 처지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화도 인터넷도 다 끊겨서 일자리를 찾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푸드뱅크는 끼니를 때울 수 없을 만큼 가난한 극빈자들에게 식재료나 음식을 무료로 나누어주는 민간자선단체다. 2007년 경제위기와 함께 전국적으로 50여 개가 생겼는데 당시 이용자는 연 3만 명 수준 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국적으로 400개가 넘는다. 이용자 수도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2013년에 35만 명, 2014년엔 100만 명을 넘겼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완벽한 복지를 누리던 영국. 그 영광을 뒤로하고도 여전히 전 세계 경제규모 6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이건만 끼니를 때우지 못해 푸드뱅크를 찾는 사람들이 백만 명에 달한다니.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설마’가 아닌 엄연한 현실이다.

2011년 3백만 명을 바라보던 실직자 수는 이제 2백만 명을 밑돌고 있다. 부동산 가격도 꾸준히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GDP도 더디게나마 성장세다. 영국정부가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들이다. 그런데 푸드뱅크를 보면 상황이 전혀 달리 보인다.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절망과 비탄에 빠진 존재들의 행렬이 해마다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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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빈곤층 인구는 1천 3백만 명에 이른다. 전체 인구가 6천 4백만 명 정도니 대략 여섯 명중 한 명은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셈이다. 푸드뱅크는 그들 중 상당수가 끼니를 거를 만큼 극빈층에 속하며, 그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3만 명에서 35만 명으로 그리고 100만 명으로…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이 자타공인 선진국의 국민을 이토록 비참한 굶주림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걸까?

원인은 여러 가지다. 일단 지난 5~6년간 영국의 물가가 30%나 올랐다. 그중 장바구니 물가는 2007년 대비 12%가 올랐다. 소고기나, 버터처럼 50%가 넘게 오른 식료품도 상당수다. 반면 영국인의 평균 수입은 9%나 줄어들었다. 물가는 대폭 오르고, 수입은 대폭 줄어드니 소비성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농림환경부(The Department for Environment, Food and Rural Affairs report)는 2007년과 2013년을 비교해본 결과 구매력이 6.1%나 하락했다면서 저가 상표의 구매가 늘었으나 물가상승의 영향으로 가구당 지출은 오히려 더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식품을 살 최소수입마저 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식료품을 무료로 제공해주는 푸드뱅크로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정부는 푸드뱅크를 돕기는 커녕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의심한다. 스스로 끼니를 해결 할 수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까지 양심을 속이고 푸드뱅크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영국의 무직자들은 월 40만원 가량의 정부 보조금으로 연명한다. 그런데 정부는 2013년 한해에만 87만 5천 명을 ‘보조금 지급금지 대상’으로 분류해 버렸다. 월 40만 원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던 87만 5천 명의 무직자가 당장 목구멍에 밀어 넣을 빵을 구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푸드뱅크를 운영하고 있는 트루셀 재단 (Trussell Trust)은 조사를 통해 이용자가 늘어나는 이유의 45%는 정부지원이 지연되거나, 지원법이 바뀌었기 때문이고, 22%는 경제위기에 희생돼 저소득층으로 전락한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푸드뱅크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수치심을 느낀다. 그들은 공짜가 좋아서 오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부가 권력유지에만 몰두하지 말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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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전문 연구재단 JSF는 영국 남성의 25%, 여성의 15%가 최저생계비 이하의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데이비드 카메룬 연립정권은 전국민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의 해법으로 복지정책 축소와 공공예산 삭감을 진행해 왔다.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이 궁지에 몰리고, 빈부 격차가 커지고 나아가 굳어질 수 밖에 없는 정책들이다. 누구를 위한 경제회복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자선단체인 옥스팜과 푸드뱅크를 이끌고 있는 영국성공회 그리고 어린이 빈곤퇴치 그룹 (Oxfam, Church of England and Child Poverty Action Group)은 정부가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세 가지를 주문하고 있다. 첫째, 국가 차원의 급식네트워크를 만들 것. 둘째,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자를 공정하게 대우할 것. 셋째, 믿을 수 있는 복지정책을 펼칠 것. 그러면서 영국 정부와 사회 모두가 ‘굶주림 없는 영국 (Zero-Hunger Britain)’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굶주림 없는 영국 (Zero-Hunger Britain)’ 이라니. 21세기에. 그것도 영국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단어가 등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GDP가, 경제순위가 아무리 높으면 뭐할 것이며, 생활 수준이 높으면 뭐할 것인가. 국가와 국민은 무엇으로 자부심을 느낄 것인가? 단 한 명이라도 굶는 이가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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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입니다

    가까운 미래의 대한민국 모습이겠네요…

  • Seungjin Son

    제가 있는 버밍엄에서는 푸드뱅크 창고가 다 차서 음식기부보다는 돈으로 기부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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