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완결 지은 ‘친일파의 나라’

광복 70주년이 다가오는데 황당한 소리가 들려온다. 임시공휴일 지정과 3일 연휴로 9조 원의 경제유발 효과가 있단다.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해 줄 테니 모두 놀러 나가 소비를 진작시키라는데 광복절을 행락 판으로 만들 셈인가? 광복 70년이 놀고먹는 날은 아니다. 특히 ‘친일파의 나라’를 완결 지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앞장서서 광복절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제1~3공화국(1948.8~1972.10)에서 ‘친일파 득세, 독립유공자 괄시’라는 불변의 진실은 다음 자료를 통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이 기간에 대한민국의 정·부통령, 국무총리, 장관, 국회 정·부의장, 대법원장·대법관, 검찰총장,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포함하는 핵심요직 414개에 앉았던 사람들의 일제강점기 경력을 보면 각 공화국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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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전체 414개 중에서 26.8%인 111개 자리를 장악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나 판검사 출신,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장교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사람 중에서 요직에 오른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자. 고작 7%인 29개다. 이른바 뉴라이트들은 친일인명사전이 대한민국 건국의 정체성을 훼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제1~3공화국에서 독립유공자들이 권력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객관적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7%대 26.8%가 바로 1~3공화국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다. 이런 분석틀로 각 공화국의 성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제1공화국 독립유공자 11.4% 대 친일파 25.9%

제1공화국의 185개 요직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11.4%인 21개 자리에 오른 반면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25.9%인 48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국회의장 이승만/ 국회의장·부의장 신익희/ 대법원장 김병로/ 부통령 이시영·함태영/ 국무총리·국방부장관·내무부장관 이범석/ 농림부장관 윤건중/ 문교부장관 김법린/ 법무부장관 이인·김준연/ 법무부장관·검찰총장 서상환/ 외무부장관 임병직/ 재무부장관 김도연/ 체신부장관 장기영·강인택·이 광 (16명)

부통령 김성수는 사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그의 친일행위로 인해 서훈 취소 논란이 끝이지 않고 있어 독립유공자 통계에서 제외했다. 국가보훈처는 김성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서훈 취소를 유보한 상태다. 윤치영은 1982년 건국 포장을 받았지만 2011년 4월 언론인 장지연 등과 함께 서훈이 취소됐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다음과 같다.

부통령 김성수/ 부통령·총리 장면/ 총리서리·내무부장관·대법관 백한성/ 교통부·내무부·상공부장관 김일환/ 국방부장관·육군참모총장 신태영/ 국방부장관 김정렬/ 내무부·농림부장관 이근직/ 내무부·법무부장관 이 호·홍진기/ 내무부장관·국회부의장 윤치영/ 내무부장관 김형근·장경근·현석호/ 농림부장관 임문환·정낙훈/ 문교부장관 백낙준/ 법무부장관 조진만/ 재무부장관 인태식/ 국회부의장 김동원·이재학·한희석/ 대법원장·대법관·법무부장관 조용순/ 대법관 최병주·한상범·김두일·김동현·김세완·김갑수·고재호·변옥주/ 검찰총장 민복기·박승준/ 체신부장관·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 이응준/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 정일권·백선엽·이형근/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종찬/ 합참의장 유재흥 (39명)

제2공화국 독립유공자 6.8% 대 친일파 32%

단명한 제2공화국의 59개 요직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고작 6.8%인 4개에 머문 반면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32%인 19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보건사회부장관 나용균/ 체신부장관 최용덕/ 국회부의장 김도연·서민호 (4명)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다음과 같다.

총리 장면/ 국방부장관 이종찬·현석호/ 내무부·법무부장관 조재천/ 농림부장관 이해익/ 문교부장관 이병도/ 부흥부장관 전예용·김우평/ 부흥부·상공부장관 주요한/ 상공부장관 이태용/ 재무부장관 김영선/ 국회의장 백낙준/ 검찰총장 이태희 (13명)

제3공화국 독립유공자 2.4% 대 친일파 25.9%

일본군 소위이자 만주국군 중위 출신인 박정희가 만주군 선후배와 정치군인들을 데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제3공화국에서 독립유공자는 가장 푸대접을 받았다.

모두 170개 요직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2.4%인 4개 자리에 올랐을 뿐이며,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25.9%인 44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교통부장관 김신/ 외무부장관 최덕신·김홍일/ 국회 부의장 나용균 (4명)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다음과 같다.

내각수반·대통령 박정희/ 외무부장관·총리 정일권/ 건설부장관 박임항·전예용·이한림/교통부장관 박춘식·백선엽/ 국방부장관 유재흥/ 국토통일원장관 김영선/ 내무부장관 엄민영/ 문교부장관 박일경·고광만/ 내무부·법무부장관 이호/ 보건사회부·체신부장관 김태동/ 외무부장관 김용식/ 체신부장관 홍헌표·김홍식·신상철/ 대법원장 조진만/ 법무부장관·대법관·대법원장 민복기/ 대법관 최윤모·나항윤·방순원·사광욱·방준경·손동욱·한봉세/ 검찰총장 정창운/ 합참의장·국방부장관 임충식 (29명)

이처럼 44개 요직을 차지했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모두 29명인데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이 9명이고, 조선총독부의 판검사 출신이 12명, 군수나 시학관 등 관리 출신이 8명이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초급장교·판검사·군수 자리에 앉아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도 승승장구해서 제3공화국에 이르자 각 분야의 최고자리에 올랐다.

국방장관 합창의장 육참총장은 친일파 독무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9년 2월까지 육군 참모총장은 일본군 장교 또는 만주국군 장교 출신들이 독차지했다. 이 자리는 일본군 대령 출신 이응준이 참모총장을 맡은 이래 일본군 중령 출신 신태영, 일본군 소령 출신 채병덕, 만주국군 헌병 대위 출신 정일권, 일본군 소령 출신 이종찬, 만주국군 중위로 간도특설대 군관 출신 백선엽, 이응준의 사위이자 일본군 대위 출신 이형근, 다시 백선엽이 이어받았다. 이상 7명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도 사정이 다를 게 없었다.

그 이후 상황은 어떠했나? 일제는 1943년 10월부터 학병제를 실시하여 11월 말 지원을 마감하고 다음 해 1월 20일 첫 입영자가 나왔다. 이과와 사범계를 제외한 전문·대학생 4,385명이 일본군에 끌려갔다. 학병 미지원자에게는 12월 15일 징용령이 발동됐다.

학병들은 단기 교육을 받고 현지에서 장교로 임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렇다고 모두 장교를 지원한 것은 아니다. 장준하나 김준엽 같은 사람을 목숨을 걸고 탈주를 해서 광복군에 합류했다.

1959년 2월부터 1960년 5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송요찬은 지원병으로 입대해서 종전 당시 일본군 준위였다. 이후 제3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12년 동안 육군 참모총장은 학병출신 일본군 소위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어받았다. 학병 출신 장교들이 자발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진기록은 진기록이다.

그렇다면 제1~3공화국에서 육군 참모총장 16개, 합참의장 11개, 국방부 장관 18개를 합쳐서 45개 군부 요직 중에서 광복군 또는 학병 탈출자 출신은 몇 개 자리에 올랐을까? 정답은 단 한 개다.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이 1948년 8월부터 1949년 3월까지 국방부장관을 지낸 게 유일하다.

대법관·내무부장관도 친일파 천지

제1~3공화국에서 대법원장과 대법관 자리는 모두 45개였다. 이 중에 47%인 21개를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들이 차지했다. 독립유공자는 일제강점기에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내고 수많은 항일사건을 변론했으며, 해방 후 1948년 8월부터 1957년 12월까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가 유일하다.

검찰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검찰총장 11명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일제강점기에 대구애국단 사건으로 투옥됐으며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했고, 해방 후 1950년 6월에서 1952년 3월까지 재임한 서상환이 유일하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4명이다.

한편 치안과 지방행정을 지휘했던 내무부장관도 친일인사가 득세했던 자리다. 제1~3공화국에서 내무부장관은 중복 임명을 포함해서 30명인데 이 중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가 13명이고, 독립유공자는 이범석 단 한 명뿐이다.

이렇듯 1~3공화국에서 친일파 득세, 독립유공자 괄시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일제강점기에 부역했던 사람이나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를 외면했던 사람과 그들의 후손들은 이런 점에서 커다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이들이 역사교과서를 입맛대로 미화한다고 해서 없었던 정통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1~3공화국 특히 제3공화국이 정통성이 결여됐다 하여 21세기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모두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이룩한 성과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화해하는 길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진실-반성-화해를 모색해야 할 날에 3일 연휴, 경제유발효과 9조 원을 외치는 박근혜 정권이 그저 한심하고 딱할 따름이다. 하긴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 정영길

    정작 부끄러워 해야할 후손들이 과거를 묻고 사는 현실에
    앞으로 우리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시기를 맞으것 같습니다.

  • John C

    마치 친일파라서 특혜를 받아서 정부 요직에 앉게 되었다 이런식으로 몰아가시는데요 글쓰신 분이 정직한 분이라면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사람수 (5000 여명) 가 독립유공자 수 (900 여명) 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도 밝혀야 하겠죠. 독립유공자 7%대 친일파 26.8%가 바로 1~3공화국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다 라고 주장하셨는데 이 수치들로 나눠서 제대로 계산하면 7%/900 = 0.0078, 26.8%/5000 = 0.0054 로 오히려 독립유공자가 등용될 확률이 친일파가 등용될 확률보다 높게 나오네요. 그럼 독립유공자가 제1-3 공화국에서 우대받았다는 객관적 지표가 되겠군요.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사람의 과반수가 일제시대에 경찰, 군인 (중위 이상 모두 포함), 또는 관료직에 종사했던 사람들인데 그들을 다 배제하고 어디서 경찰총장, 참모총장, 대법관 이런 일을 할 사람들을 구할까요? 시골 변호사 아무나 불러다 대법관을 시키나요 재판 경험이 있는 사람 시키나요? 독립운동했다고 정부요직을 맡을 자격이 저절로 생기는건 아니죠.

    그리고 군부요직중에 광복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 다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다 이런식으로 쓰시는데 소위 광복군이란게 해방당시 350여명 밖에 안되었고 전투경험도 없었다는 사실은 상관이 없을까요? 비교해서 20만 조선인이 일본군에 복무한걸 고려하면 일본군 출신이 군부요직에 많았다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 신명식

      기본통계를 모르시네요. 독립유공자는 900명이 아니라 1만명이 넘습니다.

      • John C

        독립유공자는 개인이 임의로 정하는게 아니라 국가가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에 따라 정합니다. 독립 유공자 1급 29명, 2급 88명, 3급 780명 통합 897명 입니다. 님이 말하는 1만명의 명단은 어디에 있습니까?

        • 신명식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대통령포장 모두 여섯등급입니다. 3등급까지 통계를 이야기하면 안되지요. 관점의 차이야 토론을 하면되는데 기초적인 사실관계가 틀린걸 자꾸 거론하시네요.

          • John C

            위키백과에 897명 3급까지 나와있습니다. 거의매년 독립유공자 명단에 계속 추가하는것 같은데 위에 퍼센트를 계산할때 언제 명단을 기준으로 한겁니까?

          • 신명식

            그거야 친일인명사전 발간시점에서 비교를 했지요. 국기보훈처 홈피를 보세요. 위키백과는 그리 믿을게 못됩니다.

          • John C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고의로 친일경력자들을 우대할 합리적 이유가 전혀 없는데요. 이런 분석은 친일파의 기준, 독립유공자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완전히 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고 중요한건 자격있는 사람들중 친일파가 우대받았느냐 아니냐 인데 이는 독립유공자중 유자격자가 몇이냐 친일파중 유자격자가 몇이냐를 먼저 계산해야 제대로 답이 나올것 같군요. 정부요직중 친일파가 다수 있었고 독립유공자 수보다 많았다 이런식의 단순한 비교는 무의미 하다 봅니다.

    • 신명식

      그리고 대학생이 학병으로 징집되면 선택을 할수 있었습니다. 장교훈련을 받든지 전선에 사병으로 가든지.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해방후 육사에 많이 들어갔는데 과거 전선에서 탈출하거나 사병으로 있던 사람들은 밀려나고 장교훈련받았던 사람들만 요직에 올라갔습니다. 전시하에 단기훈련 받고 일본군 소위 1년이나 몇달 한게 그렇게 대단한 경력인가요?

      • John C

        장교훈련 받은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안받은 사람보다 나을건 당연하지 않나요? 계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더 군대 지휘 경험도 많을거고. 어쨌든 그게 핵심이 아니잖습니까? 핵심은 일본군에서 중위 이상이었으면 무조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인명사전에 수록된다는 겁니다. 님이 지적하셨듯 소위나 중위가 대단한 경력도 아니고 높은 계급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그랬냐 하면 박정희 중위를 친일파 명단에 넣으려고 중위 이상으로 결정한 겁니다. 이게 친일파 논란의 본질이지요. 사실은 반대파를 친일파로 몰기위한 정치공세에 불과한 겁니다. 김일성 내각도 살펴보면 서열 2위인 부주석을 비롯 다수의 친일파 출신들을 등용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 신명식

          일본고등문관시험 합격후 시보 2-4년 거쳐 군수 판검사 되면 고등관7등 입니다. 이런 조선인이 약 500명 추정.
          4년제 일본육사나 2-4년제 만주군관학교 마치고 6개월 견습사관 거쳐 소위 임관하면 고등관8등, 2년후 중위진급하면 고등관7등. 군수동급인데 힘은 더 큽니다. 육사 132명. 만주군관도 그 정도. 일본육사 정원 천명 넘을때 조선인은 서너명 입학허가.
          전쟁말기 6개월교육받고 현지 임관은 격이 처집니다.
          요즘 대한민국 소령이 사무관급. 그런데 일본군중위가 군수동급입니다. 군국주의시절이니 가능했습니다. 지방자치이시행 전에 군수는 서기관이나 부이사관이 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표적삼을 일이 없지요. 사관학교 출신 중위는 조선인으로서는 드문 고위직입니다.

          • John C

            사관학교 출신 장교나 학병출신 장교나 소위는 소위 같은 계급 아닙니까?소위와 중위는 장교중 최하 등급이지요. 조선인중에 장교가 적었다고 해서 낮은 등급이 높아지는건 아니죠. 소위가 대단한 경력 아니라면서 중위가 고위직이란건 앞뒤가 잘 안맞는것 같은데요.

          • 신명식

            단기교육 소위가 별거 아니라고 한겁니다. 사관학교 출신과 위상이 다릅니다. 지금도 육사출신 소위와 3사출신 소위가 승진에서 같습니까? 그리고 사관학교 출신 중위가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일제때는 군수판검사급 고등관입니다.제 글을 찬찬히 읽고 이해 해보세요.

        • 신명식

          에고,사관학교 출신 장교가 아니라 학병출신 장교 이야기 한건데요. 북한이 했다고 우리도 그럴 필요는 없는데 북한 서열2위가 누구였나요? 이름을 알려주면 제가 그 사람 경력을 알려드릴게요.

          • John C

            김영주 – 북한 부주석, 북한내 당시 서열 2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광복 이전에는 일본 관동군의 통역으로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일행위는 철저히 비밀에 붙인 채 57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시작으로 권력 요직을 거치면서 7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에 이어 실질적 2인자 역할을 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 비서겸 조직 부장이라는 핵심 요직 역임.

            이승엽 – 북한이 1948년 채택한 헌법에 따라 구성된 초대 내각 사법상에 임명된 이승엽은 전향 친일자 교육을 담당했던 대화숙(大和塾) 출신으로 인천양곡조합 간부를 역임했다. 일제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친일파 건국 관련자료를 집필한 김원률씨는 “여러 사료를 통해 이승엽의 친일행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승엽은 남로당 2인자로 남로당 중앙위원과 경기도당 위원장을 거쳐 48년 월북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서울시 인민위원장 직책을 가졌다.

            정국은 – 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친일밀정, 즉 일본간첩출신)

            홍명희 – 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김정제 –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하 양주군수)

            조일명 –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이 활 – 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 – 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 –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최승희 – 일제하 친일단체 예술인 총연맹 회원

            박팔양 – 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친일기관지 만선일보 편집부장, 문화부장)

            한낙규 – 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하 검찰총장)

            정준택 – 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하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 –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 함흥철도 국장)

            장헌근 –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하 도의원)

            1981년 출판된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사전편찬위가 지난달 발표한 친일 인사 3090명의 명단에는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과 이름이 일치하는 경우가 42명으로 나타났다.

            경제관련 인재 등용에서 김일성은 남한보다 더 실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김일성은 일본인과 일본기업에 종사한 기술자들을 우대했다. 남한의 미군정이 일본인 기술자를 대부분 일본으로 추방한 데 반해, 북한에서는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오 전수석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당시 868명이었다. 이들 가족까지 합하면 2,095명이다.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4,000원,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에게는 생명과 재산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

            나라정책연구원 김광동 박사는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담론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실제 법령과 재판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르주아 계층을 타도해 소비에트화를 완성하기 위해 친일 명분을 내세운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인 조만식도 불순분자, 친일파로 낙인을 찍어 숙청해버린 것처럼 정적(政敵) 제거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친일파 청산은 사실상 구호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 신명식

            기초적인 현대사공부가 부족한 분 같아서 이걸로 끝내겠습니다. 해방후 친일파들이 내세운 논리가 도지사 지낸 사람이나 놋그릇 몇개 전쟁물자로 공출한 농민이나 먹고살기위해 일제에 협력했다고 변명했습니다. 요즘 뉴라이트들이 똑같은 주장을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인 모두가 친일파라고.
            친일인명사전 수록할때 선정기준이 두가지 입니다. 일정한 지위를 가진 지위범, 지위가 높건 낮건 구체적 친일행위가 있는 행위범입니다. 예를 들어서 박정희는 군수와 동급인 고등관7등이라서 지위범 입니다. 면장 정도는 처다보지도 못할 고위직입니다.
            신기남 아버지는 헌병 오장(지금의 하사)이지만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구체적 사실이 있으므로 행위범입니다.
            그리고 판검사 지내다 퇴직후 변호사개업해서 독립운동가를 변론한 기록이 있는 사람은 사전수록에서 보류 했습니다. 물론 다른 친일기록이 없는 사람에 한해서 입니다. 변론이 돈벌이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신중하게 처리한 겁니다.
            일본육사 다니다 일제가 패망해서 임관 못한 사람도 제외. 고등관이 이니기 때문입니다.
            뉴라이트들은 물타기를 하려고 금융조합 서기, 면서기들도 친일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들이 일제에 협력했지만 친일파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여간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서 친일인명사전 1권 앞부분에 해제편을 보세요. 각 분야별로 선정기준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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