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강도 쿠데타’와 ‘좀비 민주주의’

-폴란드, 영국, 우간다, 그리고 한국

1. 지난해 12월 12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중심부에 있는 헌법재판소 앞. 5만여 명의 시민들이 넓은 광장과 도로를 가득 메웠다. ‘헌법 수호’, ‘민주주의 수호’ 등의 구호가 울려퍼졌다. 집회를 마친 시위대는 “카친스키는 폴란드를 떠나라” 등이 적힌 팻말을 흔들고 ‘자유, 평등, 평화’를 외치며 의회 건물을 지나 대통령궁까지 행진했다. 극우보수정당인 ‘법과 정의당’이 집권한 이후 갈수록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데 대한 항의시위였다.

‘법과 정의당’ 당수 야르슬로프 카진스키는 2015년 10월 총선에서 압승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 뒤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헌법재판소 재판관 5명의 임명을 취소하는 등 사법부 통제에 나섰다. 또 권력남용 혐의로 3년 형을 받은 측근을 사면하고 정보기관 수장으로 임명해 국민들을 경악케했다. 미디어법 개정으로 공영방송사를 사실상 국영화하는 등 언론도 손아귀에 넣고 있다. 세계헌법재판기관 회의체인 베니스위원회는 폴란드정부의 사법부 통제를 규탄하는 보고서를 냈다. 폴란드 야당과 반정부 인사들은 폴란드가 공산체제 붕괴 25년 만에 최악의 헌정위기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고 말하고, ‘법과 정의당’이 밀어붙이는 일련의 반민주적 조치를 ‘저강도 쿠데타(creeping coup d`etat)’라고 규정했다.

2. 지난 주말(3월 5일) 영국 노동당 당수 제레미 코빈은 카디프에서 열린 노동자 집회에 참가해 보수당 정부의 노동법개악을 규탄했다. 그는 소방차 위에 설치된 임시 연단에 올라 정부가 내놓은 새 노동법이 파업 요건을 대폭 강화하는 등 노조의 권리를 박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노동자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영국 보수당 캐머런 정권은 지난해 공공부문 파업 요건 강화, 파업 시 대체노동자 투입 금지 조항 철폐, 노조의 정치분담금(Political Levy) 규제 등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대처 정부 이후 30년 만에 최악의 노조탄압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이 법안은 현재 영국 상원에 계류 중이다. 국제노동기구 ILO은 영국 정부에 대체근로 허용 등은 국제노동법 기준에 위배된다며 문제 조항의 재검토를 촉구했다.

코빈은 지난 2월 데일리미러 기고문을 통해 보수당 정권이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탄압하고 야당의 돈줄을 죄는 법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그 배경에는 부를 상위 1%에 몰아주고, 보수당 1당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코빈은 폴란드의 ‘저강도 쿠데타(creeping coup d’etat)’를 언급하며 보수당이 영국을 1당 지배체제의 ‘좀비 민주주의(Zombie Democracy)’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3. 지난 2월 20일 부정선거로 얼룩진 우간다 대선에서 현직 대통령 요웨리 무세비니의 당선이 확정됐다. 86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이미 30년째 대통령을 하고 있는 그는 다시 임기를 5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우간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무세비니가 970여만 표 가운데 61%를 득표해 35%에 그친 야당 후보 키자 베시그예를 누르고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EU 선거감시단은 20여 개 지역에서 경찰이 야당 지지자들을 위협하거나 체포하는 등 대선이 매우 험악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됐고, 선관위의 독립성과 투명성도 보장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선관위가 무세비니의 당선을 확정할 때 베시그예는 중무장한 경찰에 의해 가택연금된 상태였다. 경찰은 항의하는 야당 지지자들을 향해 고무탄과 최루탄을 발사했다. 우간다 통신위원회는 이날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자국 내 SNS를 차단했다. 야당인 민주개혁포럼(FDC)은 “우리는 지금 ‘저강도 정치 쿠데타(creeping political coup d’etat)’를 목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uganda

4. ‘저강도 쿠데타(creeping coup d`etat)’는 영어 표현 그대로 슬금슬금 진행되는 쿠데타다. 탱크와 총칼을 앞세운 기습적 정권 탈취와는 달리 겉으론 합법적인 틀 속에서 진행되지만 결국 민주주의의 질서와 성과를 무너뜨리는 퇴행적 정치 행태를 일컫는다. 최근 공교롭게 폴란드, 영국, 우간다 집권세력이 ‘저강도 쿠데타’를 감행하고 있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

여기에 한 나라가 더 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폴란드 극우보수 정권의 사법부 통제, 언론장악 등을 보면 우리와 판박이다. 노동법 개악을 개혁이라며 밀어붙이고 있는 영국 보수당 정권의 모습에서 한국 청와대와 여당이 겹쳐진다. 그러고 보니 두 나라의 정치적 퇴행을 한국은 다 겪고 있다. 아직 우간다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성공회대 이남주 교수는 지난해 말 창비주간논평을 통해 한국 사회가 저강도 쿠데타, 신종 쿠데타 국면을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정부의 출범 이후에 삼권분립 무시, 국정원의 정치개입 등의 사태가 반복된 것을 보면 대통령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다. 이제 국정화 추진의 전제가 되고 있는 발상들이 한국사회 전반을 관통하게 된다면, 그 과정은 스멀스멀 진행되는 일종의 저강도 쿠데타(creeping coup d’état), 곧 민주적 체제의 점진적 폐기로 완성될 것이다. 이는 신종 쿠데타 국면으로, 6월항쟁의 승리를 경험한 국민을 속이고 달래고 을러대면서 수구세력의 영구집권체제를 복원하려는 21세기 한국의 맞춤형 변종 쿠데타라 할 수 있다.

column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당시 나온 논평이긴 하지만 전교조 무력화, 통진당해산, 민주노총 침탈, 노동법 개악 추진, 테러방지법 통과, 그리고 급기야 어제(3월 8일) 사이버테러방지법 제정 본격화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저강도 쿠데타’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는 87년 이후 조금씩 쌓아온 민주주의의 성과를 하나둘씩 박탈당하고 있다. 지배블록은 그들의 영속적 지배체제 구축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제도와 집단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고 있다. 이렇게 간다면 유신독재 체제로의 회귀는 아니더라도 코빈이 말한 ‘좀비 민주주의’를 피하긴 힘들 것이다. 지배세력의 저강도 쿠데타를 저지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한국 사회 99%의 과제다. 왜냐하면 우리 후대의 삶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제레미 코빈의 데일리미러 기고문 중 한 구절이 가슴을 후벼판다.

근대의 기억에서는 처음으로, 우리의 아이들 세대가 그 부모 세대보다 더 못살게 되는 상황이 오고 있다.

우리도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 등의 질곡을 지나왔지만 그래도 부모 세대는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마련해 주기 위해 진력했고,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리고 실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조금씩 나은 환경을 후대에 물려줬다. 하지만 지금 부모 세대는 근대에 접어들어 처음으로 자신들보다 더 억압된 정치, 더 빈곤한 경제, 더 불행한 삶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세대가 되고 있다. 지금 부모 세대들은 그냥 이렇게 살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겁한 세대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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