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가 불러온 매카시즘 광풍…1년 5개월 뒤 무엇이 남았나?

RO(Revolution Organition, 혁명조직).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에 동조하는 비밀지하조직을 뜻하는 이 말은 지난 1년 5개월동안 우리 언론에 가장 많이 언급됐던 단어 가운데 하나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불꽃이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2013년 8월, 국정원이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의 사무실에 대해 전격적인 압수수색에 나서는 등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이 불거지면서 시민들의 촛불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 하에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요원들이 온라인 상에서 지속적으로 여론 조작을 해왔다는 사실이 내란음모 사건 이후에도 계속 드러났지만 지난 대선의 수혜자인 박근혜 정부는 다시금 피어오른 ‘종북’ 논란의 물살을 타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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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문란’ 덮은 ‘내란음모’

그 다음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을 연상케하는 ‘신 공안시대’의 부활이었다. 내란음모 사건이 불거진 지 3개월 뒤 정부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그리고 불과 1년 만에 정당 해산은 현실이 됐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21일 신년 업무보고에서 ‘헌법가치 부정세력 발본색원’을 주요 실천과제로 제시하고 공안 수사 역량을 대폭 강화하겠다 공언한 것은 2015년에도 우리 사회에 매카시즘 광풍이 계속 몰아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런 가운데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양승태 대법원장)는 22일 내란음모 사건의 종지부를 찍었다. 상고 기각. 내란 음모 혐의는 무죄, 내란 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한 원심의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전 의원은 징역 9년에 자격정지 7년, 함께 기소된 김흥열 전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위원장, 이상호 수원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센터장, 홍순석 전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등 6명에 대해선 2~5년의 징역형이 확정됐다.

대법원의 선고 직전까지 초미의 관심사는 ‘RO가 존재하는가’였다. 원심을 받아들여 내란음모가 인정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이후 34년 만에 또 한번 ‘가짜’ 내란음모 사건을 목격한 것이 된다. 반대로 원심의 판결이 뒤집혀 내란음모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 결정이 나게 되면 온 국민을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RO의 실체가 확인되고 이후 정부의 공안몰이는 더욱 탄력받을 수밖에 없다.

최후의 선고가 나오기 전까지 많은 국민이 맘 졸여가며 지켜봤을 만큼 RO는 우리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돼 왔다. 결과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RO에 대한 공포는 수사기관과 수사기관의 발표 내용에 피와 살을 입힌 일부 언론들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

※ 당시 중간수사결과 발표 보고서(PDF)

실제 이 전 의원 기소 직전인 2013년 9월에 발표된 수원지검의 중간수사결과는 국민들을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RO는 강령과 조직 체계, 조직원 가입 절차 등을 가진 실체적인 지하혁명조직으로 민혁당의 유산을 이어받아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에 동조하는 활동해왔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었다. 단선연계 복선포치, 즉 점조직의 형태로 조직이 운영된다는 점, 첩보물을 연상케 하는 보안 수칙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점, 종종 북한말을 섞어 쓴다는 점 등은 RO의 실체를 보장하는 듯 보였다.

특히 이들이 폭력혁명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검찰의 발표는 여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전 의원 구속을 앞두고 <한국일보>가 공개한 이른바 ‘5월 회동’의 녹취록 내용과 맞물리며 R.O에 대한 공포는 극대화됐다. 이후 공판 과정에서 녹취록에 등장한 ‘전쟁을 준비하자’, ‘성전 수행’, ‘전쟁에 관한 주제’ 등 자극적인 용어들은 ‘구체적으로 준비하자’, ‘선전 수행’, ‘전쟁 반대 투쟁’의 오기임이 드러났지만 이같은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전 의원 등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이 RO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제시한 주요 증거는 세 가지다. 제보자 이 모 씨의 진술 내용과 600여 점의 압수수색물, 그리고 2013년 5월 10일과 12일에 있었던 곤지암 청소년수련원과 합정동 마리스타 수녀원의 회동 내용 등을 담은 녹음 파일이다.

이 가운데 이 씨의 진술은 국정원이 수사를 통해 파악할 수 없었던 부분, 즉 RO의 강령이나 가입 절차, 구체적인 조직원과 직책 등을 밝히는데 거의 전적인 역할을 했다. 더불어 이 씨의 진술은 다른 증거인 녹음 파일에 나타난 모호한 대목들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 씨의 진술은 사실상 RO 실체의 전부이자 내란음모 사건 전체를 꿰는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애당초 1심 때부터 이 씨 진술의 신빙성은 논란이 됐다. 국정원에 포섭되어 3년이나 수사관들과 호흡을 맞춰온 그의 말을 온전히 사실로 받아 들이기 힘들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입장이었다.

실제 법정 공방 과정에서 그가 필요에 따라 진술을 바꿔왔다는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내란음모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인 2010년 말 국정원 조사에서 이 씨는 자신을 ‘내일회'(위장명 ‘산악회’)의 조직원이라고 진술했다. 때문에 국정원 내사 단계의 이 사건의 이름은 가칭 내일회 사건이었다. 하지만 6개월 뒤 국정원 조사에서 그는 소속 조직의 이름을 RO라고 말을 바꾼다. ‘RO라는 명칭을 들은 것 같다’는 모호한 설명 뿐이었다.

1심 재판부는 이 씨의 오락가락 행보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술에 일관성이 있어 신뢰할 수 있다고 보고 RO의 실체 또한 받아들였다. 하지만 1심 선고 내용에 대해선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다. 선고 직후 <뉴스타파> 취재진과 만난 변호인단장 김칠준 변호사는 이 판결을 두고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단순히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와서가 아니라, 검찰의 공소 사실을 반박하는 충분한 논증을 펼쳤고 재판부 역시 이러한 부분에 대해 동의했음에도 막상 판결에는 이같은 부분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변호인이 말하는 내란음모 사건…김칠준 변호사

이 씨의 진술에 대한 재판부 간의 판단은 결국 항소심에 와서 엇갈렸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진술의 신빙성 자체는 인정했지만 그 내용이 주로 남에게서 들은 것이거나 상황이나 경험을 놓고 추측한 것이어서 RO의 실체를 입증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말단 세포원에 불과한 그가 조직의 다른 구성원과 체계에 대해 진술한 것은 짐작에 불과하다고 봤다. 내란 음모의 요건인 구성원 간의 합의 여부에 대해서도 증명이 부족하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가 RO의 실체를 인정하고 내란 음모 혐의를 유죄로 본 것에 대해선 ‘사실을 오인한 잘못이 있다’며 직설적으로 꼬집었다.

상고심에 와서는 이 씨의 진술 신빙성 자체가 흔들렸다. 그의 진술이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뤄졌는지 증명되지 않았다는 점이 추가로 지적된 것이다. 국정원과 공조해 온 이 씨의 진술을 신뢰하기 힘들다며 변호인단이 1심 때부터 줄곧 유지해온 주장이 마지막 상고심에 와서 인정된 것이다. 내란음모 혐의 입증을 둘러싼 마지막 쟁점, 소위 RO의 회합 내용이 실체적 위험을 갖냐는 부분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과 국정원은 내란음모 혐의를 두고 다퉜던 세가지 쟁점(RO의 존재, 행위에 대한 합의 여부, 실체적 위험성 판단) 모두에서 완패한 것이다.

이처럼 한 국정원 협조자의 입에서 탄생한 RO는 형편없이 허물어져 갔다. 그 징후는 공판 과정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었지만 언론은 수사기관을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를 토대로 RO의 공포심을 키우는 데 매진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여전히 내란음모 무죄 선고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최근 잇따른 공안, 시국 사건에서 보수 성향의 판결을 내렸던 대법원이 9대 4의 다수 의견으로 내란 음모에 대해 무죄를 판단했을 만큼 법리적 근거는 명확했다.

대법원 선고로 인해 RO의 탄생이 불러온 최대의 파장인 정당 해산의 정당성도 치명상을 입었다. 헌법재판소의 선고 당시 RO의 존재감은 컸다.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추종한다는 통합진보당의 숨은 목적이 RO의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실체로 인해 명백히 드러났다는 것이 정당해산 판결의 뼈대다. 결국 내란 음모가 사라진 지금, ‘실체’는 사라지고 추상적인 ‘숨은 목적’만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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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당 강제 해산…대통령을 위한 헌법재판소

RO가 우리 사회에 등장한지 1년 5개월. 그가 불러온 매카시즘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나. 혹시 모를 테러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켰다는 작은 위안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나 우리 공동체에 다양한 사상과 가치가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크게 잃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 yang hun

    이 기사에 대한 반대의견은 없는가 봅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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