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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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없는 자들

김평호 프로필 사진 김평호 2015년 03월 03일

성남미디어센터 운영위원장 / 단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사극을 보는 즐거움 중 하나는 오래된 말투를 듣는 것이다. 이 오래된 말투의 욕 중, 가장 심한 것은 ‘근본 없는 놈’이라는 게 아닌가 싶다. 이것을 요즘 사람들이 심하다 할지는 모르겠으나, 뿌리니, 전통이니 하는 것들을 몹시 강조하는 곳인지라 지금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방학 중에 한 달여 바다 건너 먼 길을 다녀왔다. ‘‘눈도 많고 날도 추운 요즘 미국과 캐나다 북동부는 갈 곳이 못된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구나‘를 실감하면서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실내에서 TV와 함께 지냈다. 오랜만에 미국 공영방송 PBS를 실컷 즐기고 돌아왔다. 물론 여기서도 온라인으로 PBS 프로그램을 일부 볼 수는 있지만 본방사수의 기쁨만한 것은 아니다.



조상 찾아주기?


그 중에 눈에 띠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으니 우리말로 하면 ‘조상 찾아주기’ 쯤 되는 ‘Genealogy Road Show’였다. 프로그램은 대략 이렇게 만들어진다. 일단 지역을 선정하고 프로그램 참여 희망자를 접수 받는다. 희망자가 방송국에 조상 찾기 신청을 하면 그 중에서 삼 사 명 정도를 선정, 조사 담당자들이 각종의 기록과 자료를 검색, 신청자의 가족사를 멀리는 사 오백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정리한다. 이후 그 지역에 가서 신청자와 조사 담당자 간에 주고받는 질문과 답변, 그리고 관련 근거 자료 등을 공개녹화하고 이후 방송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그램 제목이 Genealogy Road Show이다.


내용으로 보면 프로그램은 사적인 차원의 개인 가족사에서 시작해 이윽고는 미국이라는 큰 공동체의 역사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를 통해 프로그램은 신청자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개인과 가족과 친척, 그리고 나라 전체의 역사를 추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개인의 사적 역사라는 것이 주는 흥미로움부터, 사회 전체의 역사와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은 매우 즐겁고 의미 있는 시청경험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놀란 것은 역사에 대한 학습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제공해줄 바탕이 되는 무수히 많은 자료와 기록들이었다. 이런 자료와 기록이 없다면 애초부터 이 프로그램은 만들어질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 자료와 기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방송사는 이 기록과 자료들을 어디에서 찾는 것일까?



방대한 기록과 자료들


우선 신청자와 관련된 자료검색은 거의 대부분 미국 유타 주에 있는 ‘가족 역사 도서관’ (Family History Library)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이 도서관은 1894년 우리말로 하면 '뿌리 찾기 협회' 정도로 부를 수 있는 ‘Genealogical Society of Utah'가 설립의 시초이다. 이 도서관은 교회와도 연관이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기본은 모든 미국인들의 가족사와 연관된 자료를--미국 내 뿐 아니라 해외까지도--수집/분류/정리하는 일을 그 핵심 업무로 하고 있다. 물론 프로그램에서 활용하는 자료들이 모두 이 도서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자치단체나 연방차원의 문서기록 보관 업무 기관에서도 필요한 자료를 찾는다.


그러면 어떤 자료들일까? 일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문서, 사진, 나아가 동영상까지도 포함하는 자료이다. 조사 담당자들은 법률적으로 접근이 제한되어 있지 않는 한, 신청자 개인과 가족과 연관되어 있는 자료들, 예를 들면, 신문기사나 책, 결혼문서, 교회 세례증명서, 출생/사망신고서, 인구조사 자료, 학교 학적부나 앨범, 온갖 종류의 계약서, 거래관계 자료와 기록, 재산관계 증명서, 판결문, 수사기록, 병원기록 등등등.... 어떤 자료도 조사 및 정리의 대상이 되고 이들 기록은 경우에 따라 수백 년 전까지도 올라가게 된다.


놀라운 것은 도서관과 각종 자료를 이 잡듯이 찾아 검색하고 정리하고 분류하고 이를 설명해주는 조사관들의 끈질긴 노력보다 이들 기록물들 그 자체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많고 다양한 종류의 기록들을 오래 전부터 만들고, 보관하고,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해온 것일까?



기록의 조선?


종종 조선을 기록의 조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록의 조선? 아마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한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곰곰 짚어보면 그러한 종류의 기록은 지극히 당연한, 마땅히 해야 하는 작업의 산물이다. 그 의미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이 무슨 큰 업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기본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들이 그마저도 해놓지 않으면 그건 나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러면 조선이라는 나라에 왕실과 조정의 기록은 더러 있는데, 왜 일반 백성들의 기록은 없는 것일까?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변변한 기록으로 왕과 조정 관료들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을까? 관심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백성이라는 존재는 통치대상일 뿐 기록으로 남길만한 존재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은 것일까? 고작 600년 전의 조선인데도 남아있는 기록이라는 것이 이런 수준이다.


1086년, 지금부터 거의 1000여년 전 영국 땅에서는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의 지시로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이라는 제목의 일종의 대규모 사회/인구 센서스 책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영국의 재산관련 민사소송에서 중요한 입증자료로 쓰인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뿐 아니라 그 이전의 고려니 신라니 백제니 고구려니, 한반도를 중심으로 명멸한 이 나라들의 기록은 왜 그렇게 미비한 것일까? 그들은 기록을 남길 줄 몰랐을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록을 남겼는데 보존방법이 잘못되었거나, 보관을 제대로 하지 못해 없어진 것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반만년이네, 오천년이네 하는 역사는 도대체 어디에 그 기록과 자료를 남겨놓은 것일까? 기록과 역사의 문제를 다룬 논문들을 몇 편 읽어보았지만 명쾌한 답은 없었다.



근본 없는 자들


내 부친께서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돈을 들여 족보를 만드셨다. 그 족보를 따져 올라가면 나는 제법 높은 벼슬아치의 후손이다. 난 그 족보를 믿지 않지만 다른 형제자매들도 그러리라 짐작한다. 이런 기록들은 그냥 계통도이지-그나마 당사자들도 거의 믿지 않는 허위에 가까운-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믿느냐 안 믿느냐는 부차적인 것이고 사실 족보는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연결 도표 정도일 뿐 내용으로는 극히 빈곤한 자료다.


한국사회는 반만년 역사니, 오천년 역사니 하면서 걸핏하면 뿌리니 전통이니를 내세우는 사회다. 그러나 그 역사의 실상은 허약하다. 단적으로 말해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는 것이다. 기록이 빈약한데 뿌리니 전통이니 하는 것은 천박한 시냇물 한 줄기에 불과하다. 과거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집에 온갖 자료를 가져다 놓은 대통령이 있다 한다.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버린 대통령도 있다 한다. 대통령을 했다는 자가 스스로 거짓말을 일삼고 자료를 왜곡해 책을 내놓기도 한다. 별것 아닌 자료도 대통령 비밀이랍시고 잠가 놓고 내놓지 않는다 한다.


사건의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천안함,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묻어 버리려는 집단이 더 많고 더 힘도 세다. 진실은커녕 아예 가짜 진실이 만들어진다. 기록은 쉽게 왜곡되고 그 뿐 아니라 쉽게 파기된다. 심지어 기록과 증거가 드러나도 온갖 해괴한 변명과 논리들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장 가까운 답은 이익과 힘을 유지하는데 민낯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뿌리 없는 자들이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뿌리 없는 자들. 뿌리가 없기 때문에 지킬 것이 없다. 그래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한다. 그래서 과거의 것들을 부수고 파헤치는데 거리낌이 없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비전도 없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찾아 나서고, 새로운 것들을 쉽게 만들고, 새로운 것들에 금방 빠져든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공동의 삶에 대한 믿음도 없다. 그래서 가장 확실해 보이는 돈과 힘에 집착한다. 이기적 가족주의와 이권의 연줄 나부랭이를 뿌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식과 도덕과 윤리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끝내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나는 이런 나라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