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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피, 나르시시즘, 그리고 신자유주의

김평호 프로필 사진 김평호 2015년 04월 03일

성남미디어센터 운영위원장 / 단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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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지난 2013년 ‘셀피’를 그 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자기가 자기를 찍고 그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공개하는 것’을 의미하는 셀피. 2002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이 단어가 널리 보편화되면서 이제는 올해의 단어로까지 선정된 것이다. 한편 셀카봉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14년의 25개 발명품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자기가 자기를 찍을 수 있는 촬영 보조 도구 셀카봉은 일본에서 제법 오래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던 셀카봉이 유명해진 것은 손안에 움켜쥘 수 있는 카메라, 곧 휴대폰이 널리 퍼지면서부터이다.


여기서 질문은 ‘왜 이처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사진을 스스로 찍고 SNS를 통해 널리 공개하는 것일까?’이다. 답은 나르시시즘에 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설명이다. 흔히 ‘me-generation'이라 불리는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진, 또는 자존감 높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특히 젊은이들이--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셀피/셀카봉/SNS 등은 그리 깊이 이야기할 대상이 못 된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이라는 사회문화적 현상에는 통상적인 의미의 자존감, 자신감, 자기홍보 차원을 넘어서는 매우 음울하고 불길한 시대의 긴 그림자가 담겨 있다. 관심병, 공주병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르시시즘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 나르시소스 이야기의 교훈은 자신과 타자, 자신과 외부의 세계를 구분할 능력이 없거나, 타자와의 경계와 구분이 왜 중요하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때, 또 타자의 시선으로 자기와 세계를 볼 수 없을 때,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극단으로까지 치닫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스트라는 용어가 나오게 되었고, 사람들의 이기적 행태를 설명하는 심리적 개념의 하나로 종종 원용되고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렵지만,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보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첫째는 건강한 나르시시즘, 둘째는 병리적 현상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이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이란 인간이 내재하고 있는 인정욕구의 발현을 지칭한다. 인정이란 개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사회 심리적 조건 중 하나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삶의 기제이다. 또 제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패배자로부터 또는 노예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주체에서 올 때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SNS가 그러한 기제와 공간으로 활용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건강한 의미의 나르시시즘, 적절하게 제어된 인정욕구의 발현은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병리적 현상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이다. 병리적 나르시시즘은 반사회적 인격장애, 즉, 소시오패스와 거의 다르지 않다. 다만 의도성 여부, 그리고 장애의 정도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병리적 나르시시즘이 개인의 일탈, 미숙한 인격의 결과라기보다 사회적 병리 현상이 투영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병리적 증상을 낳게 마련이고, 이 증상은 사회성원 개개인의 인격에 스며들어 각자의 일상생활에서 크든 작든 재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리적 나르시시즘 현상을 개인의 잘못된 성품 탓으로 재단하기보다 그것이 나타나는 사회적 배경과 맥락을 함께 짚어보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망가지는 사회와 개인들-병리적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의 핵심적 문제는 타인의 입장에서 자기를,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또는 바라보려 하지 않는 사고방식과 행태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 교육, 즉 사회화 과정이 중요해진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교육은 학습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넘어 타자와 세계를 이해하는 지평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의 협소한 시야를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과 학습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과과정 익히기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교육을 사람이 성장하는 사회화 과정 전체로 이해하면, 그것은 학교뿐 아니라, 가정, 또래집단, 미디어, 직장, 군대, 동아리, 종교기관 등등, 심지어는 거리에서까지 모든 곳에서 이루어진다. 또 인격의 성장이 평생에 걸치는 일이라면 교육 역시 평생의 과정이다.


문제는 이곳들이, 즉 사회가 상식적인 규칙과 도덕에 따라 운영되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망가져 있을 때 발생한다. 망가진 사회는 망가진 개인을 낳기 마련이다. 청소년 자살률 세계 1위. 노인 자살률 세계 1위. 사교육비 지출 세계 1위. 출산율 최저 세계 1위. 낙태율과 이혼율, 성형수술 세계 1위. G20 국가 중 부패도 1위. 대한민국이다. 망가져도 한참이나 망가진 사회가 한국사회다. 최근 UN의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국민행복지수는 전쟁 와중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당연하다. 이곳에 사는 이들의 행복지수가 세계 최하위권이 아니라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사회가 이렇다면 그 사회의 가정, 학교, 또래집단, 종교기관, 미디어, 직장, 군대, 동아리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영향권에서 절대 자유롭지 않다. 개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병리적 나르시시즘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사회에 기댈 것이 없을 때, 사회의 현실이 어둡고, 미래 역시 한없이 불안할 때,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기’가 구성원들을 밀고 나가는 기본 동력이 된다. ‘생존’ 또는 ‘살아남기’에 열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남을 돌아다볼 이유도 여유도 없다. 설령 보더라도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에게서는 배울 것이 없고, 자기보다 잘난 자들에게는 질시를, 못난 자들에게는 경멸을 보낼 뿐이다.


타자의 시선에서 자기를, 그리고 세계를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겸허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화 과정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이런 덕목들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시와 경멸의 시선으로 타자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반성과 겸허함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덕목이다. 더군다나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잣대에 의해 사회가 좌우될 때, 그리고 그것이 권력집단에 의해 공공연하게 자행될 때,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는 반사회적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게 된다. 모두다 ‘무법자’인 것이다.


사회의 최상위 계급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는 자신을 반성하며 돌아보게끔 하는 존재가 없다. 이들에게 타자는 모두 경멸의 대상일 뿐이다. 주변에 머무르며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마름 집단도 마찬가지다. 위로는 질시를 아래로는 경멸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타자의 시선과 관점을 기르지 못하거나 이해치 못하는 최상위 계급의 구성원들, 그리고 그 주변의 마름들에게 남는 것은 냉소적 새디즘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의 내면은 더욱 공격적이며 잔인하게 마련이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을 모욕하는 박근혜 정부와 그 일행들의 정신적 태도는 바로 이런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인간형?


나르시시즘과 관련한 논문이나 저작들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체제가 태동하는 때와 비슷한 시기에 병리적 나르시시즘 현상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직접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도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체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체제는 어떤 인간형을 요구하는가? 여러 논의와 주장들이 있지만, 신자유주의 체제의 요체는 ‘자본이 권력의 전면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자본은 대체로 정치권력, 또는 국가의 후방에 있었으나 지금은 정반대이다. (지금의 미국은 민주정이 아니라 금권과두정이라고 부르는 이유, 또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한 대통령의 발언 등을 상기해 보라.) 변화된 권력의 지형에서 자본의 이익추구에 방해되는 요소는 - 예를 들면 노동조합 - 최대한 배제되어야 한다. 국가는 바로 이 과제를 수행하는 자본 도우미로 역할이 재조정되고 이렇게 해서 자본과 국가는 한몸이 된다. 이들이 각종의 법과 제도를 통해 자본의 이익추구를 밀어준 결과, 나타난 것은 부자는 더욱 부자로, 빈자는 더욱 빈자로 만드는 세상이다. 기가 막힌 반전이 없는 한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자본의 논리는 개인에게는 물론 사회 곳곳에서 압도적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쓸데없는 논란이나 벌이는 정치는 혐오의 대상으로 격하된다. 신뢰를 잃은 정치는 이제 기술적 의견조정 역할 정도만을 수행한다. (기존의 정치인들이 이를 오히려 즐기거나 조장하는 듯한 의심도 거둘 수는 없다.) 사회는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기업, 개인 또는 그 가족 정도이다.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M. 대처의 저 유명한 발언을 보라.) 개인은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주이며 동시에 노동자이다. (스펙, 소위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수많은 군상을 보라.) 따라서 생존의 문제는 개인의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어떻게든 복지를 축소하려는 무리를 보라.), 실업은 개인 노동자가 시장에 의해 퇴출당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든 누구든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된다.


결국, 이곳 저곳에 문제는 산적해 있지만 해결할 주체는 정말 어디에도 없는 듯한 텅 빈 공백의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진행되는 법정 다툼과 그 결과를 보라). 상황이 이렇다면 체제밖에 어떤 길이 없는 한 체제 내부의 많은 개인과 집단에 가장 중요한 가치나 목표는 ‘어떻게든 살아남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생존이 첫 번째 과제가 될 때 초점은 자신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 남을 돌아볼 이유도 여유도 없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바로 이러한 인간형, 오롯이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을 요구한다. 저항하지 않는 노동자, 고분고분한 신민, 그리고 열성적인 소비자들, 이것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상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가렴주구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역사는 참으로 오랫동안 이미 그러한 체제였다. (국제시장 영화를 보라.) 신자유주의 체제의 입장에서는 이미 준비된 가장 바람직한 인간 군상들의 사회였던 셈이다. 기가 막힐 일은 소위 진보라 자칭하는 정치집단이 이 땅에 신자유주의 체제를 도입하고 뿌리내리는 전위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위기의 대한민국


병리적 사회의 증상은 곳곳의 크고 작은 조직에, 그리고 각자의 마음과 태도와 생각과 행동에 그대로 스며든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가히 엽기적이다. (그 무엇보다 세월호 사건에 임하는 박근혜 정부의 태도를 보라.) 각자의 내면은 황폐하고 외로우며 뜨겁게 분열하고 있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대로 ‘분노하는 대중의 사회’이다. 기이한 것은 기존의 권력체제가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염려하는 것은 위태로운 상황과 조건에서 진행되고 있는 삶은 어느 순간 폭발한다는 것이고, 그때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그 이후의 그림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