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이야기

요즘 여기저기에서 인류의 미래, 과학기술의 미래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도무지 앞이 깜깜한 듯한 이 시절에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앞길을 짚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지금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싶어 미래를 화두로 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먼저 말해 둘 것은 미래는 인간의 인지능력 밖에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안다면 그것은 사실 재앙일 것이다. 미래가 미리 결정된 것이라면 인류나 사회의 미래, 나아가 현재에 대한 개입 자체도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미 물리학에서 말하고 있듯이 세계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변동 때문에 구성되는 확률적 의미의 존재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자기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은 불확실한 것에의 투신이라는 점에서 고행이지만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매우 인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그럼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바로 지금 여기이다. 지금 여기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이요 장소이기 때문이다. 먼저 뉴스로 접한 몇 가지 말고 가까운 우리 주변과 세계의 풍경들을 둘러보자.

지금 여기의 풍경들

‘1인 가구, 비즈니스 개념을 바꾼다’, ‘13살 인공지능 유진과 채팅 로봇 심심이 비교해보니’, ‘100명 중 3명만 뽑히는 대졸 취업경쟁’, ‘고용 없는 성장 한국 1위 망신’, ‘메르스 이번에도 콘트롤 타워는 없었다’, ‘지구촌은 지금 난민 시대, 터전 잃고 떠도는 이들 2차대전 이후 최대’ …

혼자 사는 사람들의 증가, 기계 친구의 등장, 사라지는 일자리, 막다른 경제, 무능한 정부, 방치되고 버림받는 인간들, 인간의 잉여화. 이들 풍경은 서로 관계없는 것들로 보인다. 그러나 잠깐만 짚어보면 이들은 서로 깊게 엮여 있는 지금 세상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사회와 개인들은 서로 소외되어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말은 어디 먼 별나라의 이야기이다. 떠돌이처럼 뿌리내리지 못한 채, 제대로 된 관계도 맺지 못한 채, 사람들은 쫓겨 부랑아처럼 살게 만들어지거나 그리 체념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노동과 일자리에 대한 비전이 없는 곳에서 사회와 타인에 대한 신뢰와 배려가 자라날 수 없다. 자기 홀몸 다스리기도 벅찬 시대에 타인과 더불어 생애를 꾸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혼자 살면서 사람에게 기대는 것보다 기계에서 위안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된 사회는 엽기적이다. 경제는 더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 함께 운용하는 경세제민의 체제가 아닌 게 되어버렸다. 정치 역시 올바름과는 한참 멀어진 채 생명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특히 약자들은 잉여의 귀찮은 존재로 보호되지 않고 버려진다. 나와 이웃, 이 나라뿐 아니라 지구 공동의 위기이다.

작금의 이런 세상에 어떤 미래가 다가오고 있을까?

신자유주의 체제, 정치경제의 미래?

세상을 결정하는 가장 큰 힘은 정치와 경제이다. 그 정치와 경제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토대로서의 이데올로기 역시 그에 버금가는 힘이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온 동력이다. 그에 따라 변화하는 시대와 사회의 미래는 대체로 정치와 경제의 권력집단이 무엇을 지향하는가, 또 이들 권력집단을 선출하거나 제어하는 소위 인민들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이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지금의 세계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체제가 지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정치는 이전의 정치와 달리 자본 도우미 위원회 정도의 기능을 수행한다. 자본이라고 다 같은 것도 아니다. 대자본이 가장 우선권을 가진다. 정치권력은 여기에서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역할 정도만 수행한다. 경제 역시 대자본 위주의 체제로 재편되며, 부익부 빈익빈의 규칙에 따라 운용된다. 이들을 제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국가는 뒤로 물러나 있고 인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있다. 그것은 국가와 자본이 공동으로 기획한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인민들 역시 그 기획에 속절없이 쫓겨 다니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으로 운용되는 체제와 그 체제 속에서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삶의 방식은 사회 다윈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된다. 적자생존이라는 자연계의 진화논리를 사회에 적용한 사회 다윈주의는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한다.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대로, 없는 자들은 없는 자들대로 이런 논리를 체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다. 가진 자들은 얘기할 필요가 없고, 없는 자들도 대체로 100명 중 3명 정도만 들어갈 수 있다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한편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들은 자신을 탓하거나, 서로를 비웃거나, 증오한다. 심지어는 승자독식 체제를 비판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불온시하거나 배제하기까지 한다.

이런 체제의 미래는 어떨까? 영화 ‘설국열차’가 잘 보여준다. 다른 길이 제시되지 않은 한, 또 우리가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는 한, 다른 미래는 없다. 지금 여기의 이 체제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문제는 이런 체제가 없는 자들뿐 아니라, 잠시 이득이 되는 듯하지만, 종래에는 가진 자들도 당할 수밖에 없는 무서운 칼이 된다는 점이다.

인공지능, 과학기술의 미래?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의 미래 모습은 별다른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체제에서 열렬하게 진전되고 있는 인공지능, 생명공학, 유전공학, 뇌과학 같은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과 투자이다. 누가 하나?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아마존, 중국의 바이두 등등. 왜? 이유는 인공지능이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정보통신 기술의 최첨단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공부할 줄 아는 똑똑한 기계를 만드는 것.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간단하게 뛰어넘고, 또 인간과 같은 의식은 없지만, 지능 —non-conscious intelligence— 은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기계, 곧 컴퓨터가 미래에 초래할 변화는 무엇이 될까?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컴퓨터가 사람을 대체하는 노동력으로 입성하면서 인간을 잉여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의 예측이다.

한편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유전공학, 뇌과학, 의생명공학 등의 기술이 여기에 결합하면서 인간의 생명이 연장되거나 아니면 아예 영원한 생존도 가능하게 되거나 —영생의 축복이라기보다는 영생의 저주에 가까울 듯하지만 어쨌든—,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으로 변신하거나 하는 등등의 예측도 공상과학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아가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유전적으로 우월하게 만들어진 인종과 자연산 인종으로 나뉘어 지는, 새로운 생물학적 계급사회의 등장도 전혀 어불성설의 미래인 것은 아니다.

이런 예측은 물론 더 장기적인 것이고 공상과학적인 요소도 있으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이런 기술의 발전이 엄청난 이익과 혜택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장밋빛 인식 또한 적지 아니 유포되어 있다. 반대로 이 같은 과학기술을 제어하거나 막아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두려운 것은 이러한 과학기술들이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질주하듯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는 공공적 제어라는 인식이 극히 부족한 체제이다. 이 때문에 과학과 기술은 언제든지 통제범위 밖으로 탈출, 인류에게 등을 돌려버릴 수 있게 된다. 인류는 다만 선한 의지 이외에 이렇다 할 대처방안을 가지고 있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미래 이야기, 한가로운 이야기?

미래의 이야기는 한가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되돌아보는 하나의 렌즈이기도 하다. 또 그래야만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허황한 공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정치든 경제든, 이데올로기든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한국이든 세계든— 미래에도 계속되도록 놓아둘 수는 없다. 죽임의 권력임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는 지금의 체제는 뒤집혀야 한다. 그 길만이 없는 자들은 물론 가진 자들 역시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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