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현상 – 그는 공화당의 업보다

트럼프 현상. 이번의 대통령 후보 토론에서도 드러났듯이 전혀 자격 없는 인물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이라는 거대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나아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까지 넘보고 있다는 기막힌 2016년 미국의 정황. 이 엽기적인 정치 지형도가 트럼프 현상이다.

그가 대략 어떤 종류의 인물인지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인종차별주의자, 백인 민족주의자(white nationalist), 극우 파시스트, 선동꾼, 남성 우월주의 마쵸, 무식쟁이, 거짓말쟁이, 과대망상증 환자… 등등. 심지어 공화당 의원, 주지사, 당료나 보수진영 인사들로부터도 이런 평가를 듣는다. ‘분열주의자에다가 품위 없는 멍청이.’ ‘양심, 죄의식, 수치심, 반성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소시오패쓰.’ ‘정서불안, 무도덕.’

가지고 있는 정치 프로그램으로도, 주변의 인물들로도, 지식수준으로도, 언행으로도, 정신상태로도, 인품으로도 트럼프는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애초 공화당에서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신참 정치인이 초기부터 승승장구하더니 기어이 후보가 되고, 대선 경쟁에서는 좌충우돌하는 언행 때문에 저급한 인간 정도의 평을 받았으며 여론조사에서도 한참 밀려났었던 도널드 트럼프. 그가 이제는 대통령 당선이 유력시되기도 하다.

도대체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트럼프 정치?

트럼프 현상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지금까지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이는 기왕의 정치를 거부하는 밑바닥 민심, 특히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다 생각하는,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해왔던 백인 노동자 집단, 더 넓게는 백인들 일반의 분노/불안 같은 감정적 앙금들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중 일부가 트럼프와 함께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너무나 점잖고 사실을 일정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이들을 끌어당기며 선동하는 것은 경제적/사회적 분노/불안 같은 것만이 아니다. 그는 적지 않은 미국인들의 마음 깊숙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인종적 편견과 증오, 소수자, 이민자들에 대한 멸시 등등도 함께 건드린다. 트럼프도 그렇고 트럼프라는 대선후보를 통하여 사람들 역시 편견과 증오, 멸시를 공식적으로, 선거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선거운동 유세장에서 통상적인 정치집회를 넘어 ‘폭력사태가 벌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어떤 분위기’를 직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닌게 아니라 트럼프의 정치는 그 행태나, 스타일, 그리고 분위기의 측면에서ㅡ이것이 정책이나 강령 같은 것보다 더 본질적인 정치의 모습일 수도 있다—네오나치들, KKK들, 이런 극우분자들의 음습하고 폭력적인, 일촉즉발의 어떤 사태가 예비되어 있는 듯한 으스스한 집회의 느낌이 있다(참고 기사). 실제 트럼프 주변에 그런 극우진영의 인물들이 있고 이들 극우단체 지도급 인물들은 최근 공개적으로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적어도 60년대 이래 숱한 투쟁과 희생을 통해 미국 사회가 이룩한 인종적 평등, 정치적 자유, 시민적 인권 등등의 윤리와 도덕을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거리낌 없이 부수어나간다.

공화당의 업보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트럼프 현상은 오로지 트럼프만의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공화당이 낳은 자식이고 트럼프는 공화당의 업보이다. 지금 공화당에서는 트럼프를 사생아처럼 취급하고 있고 트럼프와 공화당은 이번 선거에서 서로 적대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있지만—아버지 부시, 아들 부시 모두 클린턴 지지를 공언하거나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지 않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는 2016년 판 공화당의 얼굴이다.

아들 부시 대통령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보자;

레이건: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정신은 소멸된다. 우리가 가장 중시해야 할 일은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다.1989. 1. 11. 레이건 이임연설
아들 부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 우리는 모른다. 왜? 그 때 되면 다들 죽으니까… 나는 역사에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 그 때 되면 내가 죽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썼는지 못 읽으니까….2004. 4. 17. 워싱턴 포스트, 2008. 12. 23. ABC 인터뷰

아들 부시: 물고문(waterboarding;사람을 뉘인 채 사지를 묶고 수건을 덮어씌운 얼굴에 물을 쏟아 부으면서 심문)을 금지하는 것은 좋은 정보수집 방법을 막는 것이다.2008. 3. 8. 고문방지법에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1800여명이 사망한 2005년 카트리나 허리케인 재해: 연방재난청, 재해 6일이 지나서야 피해 주민 대피용 버스 요청.
아들 부시: 연방재난청의 허리케인 재해 대책은 시의적절했다. 2009. 1. 12. 이임 기자회견

이런 부시와 트럼프의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트럼프는 ‘또라이’고 이전의 공화당 대통령들은 나름의 합리적 품격을 갖춘 정치인일까?

공화당의 엽기적 비상식의 정치행태는 사실 오래된 것이다. 맥카시즘이라는 용어로 잘 알려진 50년대의 맥카시 상원의원, 64년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B. 골드워터(복지정책 반대, 노동조합 약화, 인종차별 정책유지, 소련 공산주의 파괴정책 추진 등으로 요약되는 강경 보수파), 워터게이트 거짓말로 대통령 직에서 사실상 쫓겨난 70년대의 닉슨, 그 유명한 80년대의 레이건 대통령(실상은 부패하고 무능한 대통령이었으나 미디어가 조작해낸 신자유주의 신화의 주인공), 클린터 정책에 반대 예산배정을 거부하면서 90년대 후반 아예 연방정부 문을 닫아걸었던 하원의장 N. 깅그리치, 그리고 설명이 필요 없는 아들 조지 부시 대통령(대량살상무기라는 거짓말로 자신을 비롯 많은 나라들을 중동전쟁으로 끌고 들어간 인물).

공화당 상하원의 의원들? 이들 거의 대부분은 이런 인물들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또라이들(crazies)’이 당을 장악해버렸다고 고백한 의원이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 공화당의 이런 역사는 어쩌다 벌어지는 일회적 에피소드들이 아니다. 공화당은 2차대전 종전 이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의 절제를 잃고 일관되게 자신을 지지하는 집단만의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추구해온—그런 의미에서는 철두철미한—정당이다.

클린턴 이후, 아들 부시 시절, 그리고 특히 오바마 재임기를 거치면서 공화당은 점점 더 극단화되어갔다.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극단적인 사고와 행태를 축적하면서 공화당은 기어코 2016년 도널드 트럼프를 낳은 것이다. 엽기적 정치판에 불을 댕긴 것은 트럼프지만 그 판을 깔아준 것은 공화당이다. 그 판이 너무 커지자 공화당은 그만 놀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알면서도 지옥으로 간다

생각해보면 문제를 해결하여 개인과 사회를 평안하게 만드는 노력, 그리고 그 결과를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는 사람들 곁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돈과 힘을 가진 자들은 정치를 통해 돈과 힘을 더 쌓았으며 불평등의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정치의 과정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였고 그들의 정치행태는 너무 깊게 오염되었다.

미국민들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지만, 지옥에 이르는 길을 사람들은 꾸역꾸역 가기도 한다. 그 이유는 알기 어렵고 설명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트럼프 현상은, 그가 당선된다면 엄청나게, 당선되지 않더라도, 매우 크게 미국 사회에 다가올 어두움의 전조일수도 있다.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이것이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이고 우리가 겪고 있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구체적 상황과 조건은 달랐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택한 최근 정치는 그러한 것이었다. 지옥으로 가는 줄 알면서도 그리고 갔었고, 지금도 그리고 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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