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상과 큰 인물들을 기다리며

2016년 12월 9일 국회.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 불참 1, 찬성 234, 반대 56, 무효 7. 어떤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을 듯한 기막힌 숫자의 조합. 예상을 뛰어넘는 찬성률. 말할 나위 없이 헌법 재판소가 ㅡ지금 소장이라는 자가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과 관련하여 김기춘이라는 자와 내통한 정황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ㅡ 박 씨의 탄핵을 걷어찰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결정 이후의 무서운 파장을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봐야겠다.

더 무서운 것은 헌법과 법질서 준수, 사안의 중대성, 재판 절차 등등의 명분으로 헌재가 탄핵심판법이 허용하는 최장 180일 동안 사안을 질질 끌고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 사이 황교안 씨는 대통령 코스프레하고 박씨와 그 일행은 구명을 도모할 것이고… 남한 사회 수구 기득권 집단이 지금껏 보여준 간교한 행태에 비추어본다면 이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그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헌재가 질질 끌수록,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나든, 박 씨와 그 일행, 그리고 헌재 모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사이 국민과 국가가 입는 정신적, 물리적 피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고….

어쨌든 2016년 지금의 상황은, 성급한 진단일지 모르지만, 박정희 시대의 막이 제대로 닫히는 신호탄 아닐까? 박정희가 한국 사회에 남긴 것은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무도덕, 비윤리, 무지함과 몰상식의 사회다. 그리고 그것을 강제로 덮어버릴 힘을 가진 권력기관과 돈 몇 푼이다. 그럼에도 남한의 기득권 집단들과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기에 열광적으로 집착했다. 무도덕과 비윤리, 무지함과 몰상식 여기에 권력기관과 돈이 더해지면 사회는 막장으로 간다. 역설적인 것은 박정희 막장의 추악한 정체를 이명박에 이어 그의 딸 박근혜가 직접 나서 발가벗겨 주었다는 점이다.

지금 남한 사회에는 큰 과제들이 던져져 있다. 지금까지 국정을 농단해온 ‘정치 순실이’에 이어 ‘경제 순실이’를 정리하는 과제다. 재벌은 이번 농단 사태의 또 다른 몸통이다. 그중 대표가 삼성이다. 삼성이 말하자면 ‘경제 순실이’다. 재벌은 한국 사회의 독가스다. 이번 ‘정치 순실이’ 국회 청문회는 남한 사회 ‘경제 순실이’ 문제를 그렇게 규정했다. 이것을 잡아 정리해야 한다.

정치의 괴물들, 경제의 괴물들, 인간의 탈을 쓰긴 했으나 짐승보다 더한 괴물들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산다. 이번에 해야 한다. 그러자면 큰 틀의 생각과 비전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해내고 동의를 이끌어내는, 역량을 갖춘 새롭고 큰 정치의 인물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중국인 이야기

요즘 내가 읽는 책이다. 유명한 책이라 읽은 분들도 많고 해서 잘 알려진 이야기일 터이지만,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책도 책이지만, 중국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차제에 리영희 선생의 중국 관련 책들도 다시 읽어보고 있다.

감탄의 이유는 큰 생각을 할 줄 아는 큰 인물들이 남긴 거대한 행적 때문이다. 최근 사십여 년 사이 엄청나게 떠오른 중국이라는 나라의 힘과 관련하여 M. 자크(Martin Jacques)ㅡ영국의 저널리스트. 캠브리지 대 철학박사. 영국 타임즈, 가디언 등의 칼럼니스트ㅡ는 지난 2010년 테드 강연에서 중국이라는 나라를 국민국가(nation-state)가 아니라 문명국가(civilization-state)로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무슨 뜻인가? 국토, 국민, 주권 등 소위 근대 국가의 세 가지 요소를 중국이 중시치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정부와 중국사람들은 중국을 통상적인 의미의 국가 이상으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들은 중국을 훨씬 넓고 깊은 사상과 문화, 역사적 전통을 가진 문명적 존재로ㅡ대중화(大中華, Greater China)라는 것 아니겠는가ㅡ생각하며, 그것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고자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중국과 중국사람들을ㅡ어디에 살며, 무엇을 하든, 어느 민족에 속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ㅡ나아가게끔 하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통성이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을 이끄는 리더로서 국가와 정부는 강한 위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훼손되지 않은 국가/정부의 정통성은 그러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 중국이라는 나라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큰 몫을 한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다. 한편 김명호 이영희 두 분 선생의 책 내용을 종합해보면 마오를 비롯한 중국혁명 1세대들과 그 주변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남긴 크고 작은 긍정적 유산이 지금 중국이라는 국가/정부 정통성의 핵심 뿌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쇠망한 청나라를 이어 새로운 중국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이냐는 20세기 최대의 역사적 과제 앞에서, E. 스노가 ‘중국의 붉은 별’이라 칭했던 이들 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혁명에 임하는 교조적 원칙을,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교조에 얽매이지 않은 유연한 태도를, 한편으로는 웅대한 스케일의 전략과 사고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말할 나위 없이 청 왕조의 무기력한 몰락,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그리고 지주와 대자본의 이익을 대변한 국민당 정부의 실정, 그리고 이어지는 국공 내전과 신중국 혁명의 과정에서 수천만에 이르는 무수한 인민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혁명 이후에도 중국은 숱한 고난의 산을 넘었다. 왜 중국에 과거의 고통이 없었겠고, 현재의 고난이 없겠으며, 부패와 부정과 비리와 몰상식과 무지함이 없겠는가? 심지어 1976년 마오의 사후, 4대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전개한 덩샤오핑 시대 이후 중국의 정책은 사회주의 혁명의 배신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러나 부정의 역사와 실상을 제어하고 밀어낼 수 있을 만큼, 큰 뜻을 품은 큰 인물들이 인민들과 함께한 거대한 혁명의 전통이 살아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중국이 가지는 힘을 약간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촛불의 마무리

2016년 오늘, 우리 사회는 지난 1987년에 이어 삼십 여년 만에 다시 새로운 시대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역사의 횃불을 높이 들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치욕스러운 왕조의 몰락부터 식민지 강점기,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오늘의 헬조선까지ㅡ우리 사회 근대국가 만들기의 고통은 대체로 비극으로 마무리되었다. 일제의 부역자가 오늘의 권력자로 되돌아 왔다. 갈라진 나라는 증오와 분열과 악용의 작태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민주와 평화, 정의의 희망은 탈취당했고 기대는 배신으로 돌아왔다.

이제 제자리걸음의 역사는 끝내야 한다. 반동의 역사도 함께 묻어버려야 한다. 피와 땀과 눈물의 오랜 고통은 무도덕과 비윤리, 무지함과 몰상식의 쓰레기를 걷어내고, 민주와 평화와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새로운 국가,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큰 사상과 큰 인물(들)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그 씨앗이 싹트고 성장하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기대를 받아 안고 투쟁하는 새로운 정치 지도자들을 키워내고 만드는 것. 그것이 2016년 우리의 촛불을 완성하는 하나의 마무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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