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깨어난 사람

<남영동 1985>라는 영화가 있다. 고 김근태 의원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살아나와 영화의 줄거리가 된 모진 고문의 기록을 남겼지만, 그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1985년에 공안사범으로 남영동에 끌려가 물고문을 받던 중 호흡 곤란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강원도 산중의 요양병원으로 빼돌려진 그는 민주화 운동 시기의 흔한 행방불명자 중 하나가 되어 그렇게 세상에서 잊혔다. 시골 요양원에서 신원미상의 식물인간으로 30년을 보낸 그는 2015년 5월의 어느 봄날, 창가에 날아든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딥니까?”

80년대 초반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20대 청년이 의식을 되찾고 보니 어느새 나이 50을 훌쩍 넘긴 장년이 되어 있었다. 십여 년간 그를 보살피던 요양보호사가 생각해보았다. 30년을 식물인간으로 살아온 남자에게 여기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이 언제인지 아닐까?

“여기는 선생님을 지난 30년간 보살펴온 요양 시설이고요. 지금은 2015년 5월이랍니다.”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짓는 남자를 위해 보호사는 TV를 틀어주었다. 지난 30년간 변화하고 발전한 한국의 모습이 채널 곳곳에서 펼쳐졌다. 뉴스 채널을 보던 남자가 갑자기 소리쳤다.

“저건 어떤 장면입니까?”

화면 속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제35주년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1985년에 그는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군부의 학살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썼다는 이유로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추모하는 국가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다음 장면이었다. TV 화면에는 5.18 민주화 묘역의 모습이 비쳤고, 자막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5.18 묘지 헌화’라고 나왔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대중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시나요?”

“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셨거든요.”

그는 문득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던 시절, 통방하며 지내던 옆 방 동지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혹시 김근태라는 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민청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신 분인데.”

“아, 김근태 장관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분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4년에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셨지요.”

사내의 눈이 더욱 커졌다.

“잠깐만요. 노무현 대통령이라니……. 1982년에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담당하셨던 인권 변호사 노무현 씨를 말하는 겁니까?”

요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날이 다 오는구나!

그 순간 TV 화면에 또 다른 뉴스가 떴다. ‘대통령, 청와대에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접견’ 그는 화면에 비친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잠시 혼란스러웠다.

“저 사람이…….. 지금 대통령입니까?”

“네, 박근혜 대통령이요. 박정희의 딸이 현직 대통령이지요.”

남자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차마 다음 질문을 입 밖에 내는 것이 두려웠다.

“그 사이 군사 정변이 또 일어났나요?”

“아니요, 2012년 대선에서 국민들의 다수표를 얻어 선출되신 거예요.”

30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모진 숨을 이어온 남자는, 그 순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상은 2012년 대선을 앞둔 어느 날, 혼자 해 본 발칙한 상상이다. 당시 나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선전하고 있다는 여론 조사 결과에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나름 허무맹랑한 상상이라고 해봤는데, 이런 상상을 한 편의 과학 소설로 옮긴 작가가 있다. 바로 ‘총통각하’의 배명훈이다.

소설집 ‘총통각하’에는 ‘바이센테니얼 챈슬러’라고 SF 소설의 고전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 맨’(로빈 윌리암스가 나온 동명 영화의 원작)의 제목을 패러디한 작품이 나온다. 군부 독재가 판치는 세상으로부터 달아날 길이 없던 남자가 스스로 냉동인간이 되어 미래로 도망치는 내용이다. 5년 뒤 총통 각하의 임기가 끝나면 다시 해동되어 살아날 계획이었지만, 독재로부터 달아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총통각하’를 읽고 자극받은 나도 SF 정치 풍자 소설을 한 편 써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다들 SF를 허무맹랑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MB 정권의 4대강 사업이 더 허무맹랑하다. 로봇 물고기로 하천 수질을 관리한다니, 이게 대통령이 진지하게 할 소리인가? 그래서 써 본 것이, 지난 6개월간 이곳 ‘뉴스타파 칼럼’에서 연재한 ‘UFO 추격자들’이다.

이 소설을 쓴 후, 나는 당분간 본업인 드라마 연출에 충실하기로 했다. 역시 소설 집필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 부끄러운 지난 6개월의 연재를 마치고 독자들의 눈을 어지럽힌 것에 대해 사죄하는 의미로 ‘총통각하’를 감히 추천하는 바이다. ‘UFO 추격자들’을 보고 ‘이건 뭐지?’ 했던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의미에서다.

사는 게 힘들 땐 ‘확 이민이라도 가버릴까’, 하는 사람이 있다. 난 대한민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애국세력의 한 사람으로서 내 나라를 감히 떠나지는 못하겠다. 대신 괴롭고 힘들 때마다 책 속의 가상현실로 정신적 망명을 떠난다. 앞으로 매달 한 번씩 책 속으로 떠나는 정신적 망명의 길을 안내할까 한다. 내가 쓰는 SF소설은 함량 미달이지만, 제가 읽는 책들은 걸작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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