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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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션은 생존이다

김민식 프로필 사진 김민식 2015년 10월 20일

MBC 드라마국 PD / SF 덕후 겸 번역가 / 시트콤 애호가 겸 연출가 / 드라마 매니아 겸 PD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소설 ‘마션’은 이렇게 시작한다. 과학 소설의 첫 문장으로 품위가 있는 편은 아니다. (칼럼의 첫 글귀로도 마찬가지다. ^^) 책을 읽다보면 저 대사에 깊이 공감할 수 있고, 최고의 번역이라 느끼게 된다. 화성에 착륙한 탐사대가 모래 폭풍을 만나 급하게 귀환을 시도하는데 그 과정에서 과학자 한 명이 죽음을 당한다. 어쩔 수 없이 동료의 시체를 남겨두고 대원들은 화성에서 탈출한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그 남자, 알고 보니 살아있다. 공기도, 물도, 식량도 없는 화성에 혼자 남겨진 사람. 그의 첫 독백이 바로 저 대사다. ‘나는 좆됐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주려고 해도, 화성에서 홀로 낙오된 경우라니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이 또 없다. NASA에서는 그가 죽은 줄 알고 장례식을 올리고 전 지구적으로 추모행사까지 연다. 통신 장비도 고장 나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지구에 알릴 방법도 없다. 아니 안다고 해도 그가 있는 곳은 화성이다. 구조대가 오려면 2,3년이 걸리고 그 전에 그는 굶어죽을 것이다. 이제 그는 1.자신의 생존을 지구에 알리고, 2.화성에서 농사라도 지어 식량을 재배해야하고, 3.착륙선 로켓을 개조해 화성을 탈출해야 한다.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라니, 이렇게 재미난 과학소설, 또 간만이다.


주인공에게 시련은 끊임없이 닥쳐온다. 읽다보면 어느 순간 책을 집어던지며, ‘작가가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먼!’ 하고 버럭 지르고 싶지만, 마크 와트니라는 주인공의 매력에 빠져서 다시 책을 읽게 된다. 주인공에게 닥친 비극적 상황을 보며 심지어 낄낄거리고 웃게 된다. 독자가 비정한 사디스트라서? 아니 주인공이 워낙 유쾌해서 그렇다.


마크 와트니가 탐사대의 일원으로 선발된 이유 중 하나는 낙천적인 성격과 탁월한 유머 감각 덕분이다. 1년 넘게 우주선과 화성이라는 고립된 환경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탓에 탐사대원을 뽑을 때 정신 건강이 과하게 좋은 사람, 즉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버틸 사람이 요긴했던 것이다. 하필 그 유쾌한 코미디언이 화성에 낙오된다. 자신의 개그에 반응해줄 사람 하나도 없는 곳에...


낙천적 성격 덕인지, 주인공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좆됐다.’ 같은 자조적인 유머 뒤에는 냉철한 현실 판단이 뒷받침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목숨을 건 노력이 이어진다. ‘이성으로 절망해도 의지로 낙관하며’ 그는 끝까지 버틴다.


국내에서 SF 소설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는 일은 참으로 드문데,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고 맷 데이먼의 얼굴이 책표지에 실린 덕인지 꽤 잘 팔리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안다. 영화 덕에 책이 팔리는 게 아니라, 원작이 워낙 재미있어서 누구라도 영화화를 시도했을 작품이다. 이미 영화로 봤다면, 소설로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드라마 피디가 직업인지라 영화랑 소설을 많이 보는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이상적으로 즐기는 순서는,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보는 것이다. 소설의 경우, 읽는 동안 독자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영상 해석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영화는 텍스트에 대한 감독의 주관적인 해석이 가해진 콘텐츠다. 배우도 감독 맘대로 캐스팅하고, 줄거리도 감독 맘대로 각색한다. 관객이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독해할 여지가 사라진다. 무엇보다 영화는 사색의 여지가 적다.


책을 읽으면서 즐거운 순간은 시선을 책장에서 들어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질 때다. 좋은 책은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질문에 자신만의 답을 하기 위해 책을 읽다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나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할까? 잘 만든 영화는 반대로 몰입의 예술이다. 딴 생각할 틈 없이 감독의 의도대로 끝까지 끌려간다. 영화보다 딴생각이 든다면, 그 영화 망한 거다. 컴컴한 극장 안에 갇혀서 눈앞에서 펼쳐지는 대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두 시간을 달려간다. 진정한 의미의 쌍방향 엔터테인먼트는, 그래서 책이다.


책을 보고 영화를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그림이 나오지 않을 때다. 하지만 영화가 좋아서 원작을 찾았다면 대부분 만족한다. 분량 때문에 영화에서 빠진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나니까. 특히 ‘마션’이 그렇다. 영상으로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혹은 지루할까봐 빼버린 과학적 디테일이 원작에는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다. 물리, 화학, 식물학 등의 과학적 지식이 가득한데, 그것이 전부 주인공의 생존 스킬이다. 과학과 오락의 이런 황홀한 만남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SF라고 하면 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이나 과학 환상 소설(Science Fantasy)를 뜻한다. ‘마션’은 판타지 소설은 아니고, (화성 유인탐사는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것이다.) 과학적 디테일에 작가가 온 역량을 기울인 하드코어 과학 소설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마션’은 판타지로 다가온다. 영화를 본 어느 후배가 한 말. 저 영화가 한국에서 히트하는 이유?




1.리더는 전문가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한다.
2.실무자들은 최고의,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다.
3.어딘가에 버려져, 죽음이 예정됐던 한 생명을 '구해낸다'



한국 온 국민이 간절히 바랐던 판타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