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와 슈퍼 히어로

SF 마니아로서 나는 슈퍼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데,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슈퍼 히어로를 본 적은 없다. TV 시청자들은 순정남이 나오는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현실에서는 가난한 이혼녀를 짝사랑하는 재벌2세 순정남을 찾기가 쉽지 않다.

스웨덴에서 발표한 한 논문에 따르면, 조사 대상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껏 성관계를 맺은 상대가 한두 명에 불과했지만 1,000명이 넘는 상대와 관계를 가진 ‘카사노바’ 남성이나 상대가 100명에 이르는 여성도 극소수지만 존재한단다. 자, 여기서 SF적인 상황을 하나 상상해보자. 성관계로만 전염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있고, 하필 문란한 ‘카사노바’가 ‘슈퍼 전파자’라면, ‘메르스 사태’ 버금가는 국가적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위기는 슈퍼 히어로가 나서도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다. 배트맨이나 슈퍼맨이라도 카사노바를 찾아내거나 성관계를 단속하긴 쉽지 않을 테니까.

이 바이러스에 대해 한 알만 먹으면 치료가 되고, 또 평생 감염 위험이 사라지는 백신을 개발했다고 생각해보자. 이제 관건은 백신의 효과적인 배포다. 서울역 앞에 나가서 지나가는 시민 100명에게 약을 나눠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배우자와 주로 관계를 하는 대다수의 일반인은 어차피 바이러스 감염 위험 자체가 낮은 사람들이니까. 100명 이상과 성관계를 하는 남녀 카사노바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약을 먹이는 게 해결책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가상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통계물리학자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내가 얼마 전 읽은 ‘세상물정의 물리학’ (김범준 지음/동아시아)에서 나오는 사례다. ‘많은 입자들이 상호 작용하는 물리계의 거시적인 집단 현상’을 연구하는 김범준 박사, 그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만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재미난 통찰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카사노바에게 약을 먹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서울역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예방약을 한 알씩 나눠주며 단서를 하나 붙인다.

“죄송하지만 그 약은 직접 드시지 말고, 성관계를 맺는 상대방에게 드리세요.”

‘카사노바는 극소수라 서울역 앞에서 직접 그 약을 받아갈 확률은 낮다. 하지만, 카사노바와 성관계를 맺는 상대방은 워낙 많으니, 그 많은 상대방 중 하나가 서울역 앞에서 그 약을 받아갈 확률은 상당히 높다. 마구잡이로 나눠줘도 그렇게 받아간 약이 그날 밤 카사노바에게 전달될 개연성이 아주 높다는 말이다.’
– ‘세상 물정의 물리학’ 74쪽

이 책을 읽고, 나는 슈퍼 히어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초능력을 안겨 주는 알약을 개발하면 된다. 이 약은 한 알만 먹어서는 힘이 나지 않는다. 적어도 50알 이상을 먹어야 초인의 힘이 발휘된다. 이 약을 100명의 시민들에게 나눠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 약을 직접 드시면 효과가 없습니다. 주위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선하고, 가장 정의로운 사람에게 이 알약을 전해주세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사람이 곧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눈치 챘겠지만 이것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약이다. 바로 우리가 4년에 한 번씩, 5년에 한 번씩 행사하는 투표권 말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정의의 용사도 아니다. 세상을 구할 힘도 없고, 자신도 없다. 나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기에,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표를 한 장 씩 나눠준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줄 사람에게 표를 주라고. 그가 주어진 힘을 잘 활용한다면, 배고픈 어린이에게 밥을 먹이고, 병든 노인을 치료하며,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려내고, 이 땅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킬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슈퍼 히어로가 하는 일이란, 곧 정치인이 할 일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슈퍼 히어로가 될 수는 없지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줄 슈퍼 히어로를 만들어 낼 수는 있다.

4월 13일, 우리에게 주어진 표 한 장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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