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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의 함정’, 정치의 함정

김민식 프로필 사진 김민식 2016년 09월 07일

MBC 드라마국 PD / SF 덕후 겸 번역가 / 시트콤 애호가 겸 연출가 / 드라마 매니아 겸 PD

요즘 저는 교대 근무로 일하는데, 철야 근무의 경우 오후 5시에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 7시 반에 끝납니다. 밤을 꼴딱 새워 일한 후 아침에 퇴근하고 상암에서 버스를 타면 자리가 없습니다. 강남 가는 광역버스를 타는데, 강변북로에서 막히면 30분을 꼬박 서서 갑니다. 그럴 땐, '아,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나' 싶습니다.


차라리 책이라도 편하게 읽자는 생각에 버스로 가양역까지 가서 9호선 전철을 탔습니다. 가양역 급행은 종점 바로 다음 정거장이라 앉을 자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오전 8시에 9호선 급행은 지옥철입니다. 앉을 자리는커녕 사람이 너무 많아 서서 가기도 힘듭니다. 중간에 앉을 자리가 나지도 않아요. 가양역에서 타면 신논현까지 쭉 서서 갑니다. 가양역부터 꽉 찬 9호선 전철을 보며, '아, 사는 게 왜 이리 힘들까', 싶습니다.


'일산서 오는 버스나, 김포에서 오는 지하철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뉴스를 보고 의문이 풀렸어요. 최근 몇 년간 서울의 집세가 오르면서 시내에서 외곽으로, 서울에서 경기도로 전출한 인구가 늘었답니다. 혹 누가 일어날까 앉아 가는 이들의 표정을 열심히 살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은 듯 잠에 빠져있어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고, 모자라는 수면은 전철이나 버스에서 벌충합니다. '아, 다들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냐', 싶습니다.


환승역 맞은편 승강장에서 기다리는 일반열차를 보면 텅텅 비어 있어요. 그런데도 다들 기를 쓰고 그 복잡한 급행에 오릅니다. 한번 문이 열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밀리고 쓰러지는 이들의 비명이 속출합니다. 보통 열차는 비어서 가고, 급행은 미어터지고. 가양역에서 신논현역까지 급행과 일반의 시차는 겨우 13분입니다. 출근 시간 13분을 당기려고 급행에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아, 다들 사는 게 왜 이리 힘든가' 싶습니다.


하버드 법대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가 쓴 ‘맞벌이의 함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1990년대에 미국에서 파산하는 여성이 많았습니다. 1981년 파산을 신청한 미국 여성의 수는 약 6만 9,000명이었어요. 그런데 1999년에는 그 숫자가 50만 명으로 급증합니다. 처음엔 입력하는 사람이 실수로 0을 두 개 더 붙인 줄 알았대요. 조사해보니, 파산신청을 한 여성의 수가 실제로 662% 늘어났답니다. 이혼 등으로 혼자 사는 여성만 곤경에 처한 게 아니라 수십만 명의 기혼 여성들도 남편과 함께 파산을 신청했어요.



최악의 재정난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자녀가 있는 부모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자녀가 있다는 것은 이제 여성이 재정파탄을 맞을 것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고지표다.


몇 가지 사실들을 검토해 보자. 우리의 연구는 유자녀 기혼 부부가 무자녀 기혼 부부보다 두 배 이상 파산신청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아이를 키우는 이혼 여성은 자녀를 가진 적이 없는 독신 여성보다 거의 세 배나 더 파산신청하기 쉽다.

‘맞벌이의 함정’ 16쪽


아이가 있으면 왜 지출이 늘어날까요? 엄마가 사치하기 때문에? 유기농 이유식을 사고, 명품 아기 옷을 사고, 비싼 장난감을 사는 등 명품을 소비하기 때문에? 소비 지표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지난 20년 사이 가계 지출이 과소비로 흘렀다는 증거는 없답니다. 가장 확실하게 는 건 바로 주택 구입비용입니다. 맞벌이로 가계 소득이 오른 것보다 집값이 오른 폭이 더 컸습니다. 맞벌이를 하니 아이를 돌보기 어려워지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빚을 내어서라도 좋은 학군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갑니다.


책에서 저자들은, 집을 사기 위해 빚을 지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03년의 일이에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저자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2008년의 미국의 부동산 발 경제 위기는 피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2008년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피할 수가 없었어요. 왜? 모두가 맞벌이 부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빚을 지고라도 더 좋은 집, 더 좋은 동네로 이사 가고 싶은 부모가...


9호선 전철 안, 장거리 출퇴근에 지친 사람들을 보면, 젊은 부모들이 많습니다. 20대나 독신자는 굳이 일산이나 김포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 가지 않아요. 회사에서 가까운 오피스텔이나 학군이 좋지 않은 서울 시내 빌라에서 살면 되거든요. 우리의 삶이 힘들어지는 건, 부모가 되는 순간입니다.


미국 맞벌이 가정의 경우, 부동산 담보 대출로 매월 이자 갚기도 빠듯한데, 가장이 실직하거나 가족 중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가계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돈 문제로 가정불화가 생기면 이혼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이때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이 바로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전 남편이 추심원들 등쌀에 양육비도 못 보내주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럴 때 차라리 전남편이 파산신청이라도 하면, 신용카드 채무를 면제받아 그 돈을 자녀 양육비로 보낼 수 있답니다. 편모 가정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보호 장치지요.


미국 금융회사와 카드회사의 로비로 이러한 파산법의 조항을 수정하자는 법안이 상정됩니다. 그 법안이 통과될 경우, 이혼한 편모들이 전남편의 소득을 놓고 신용카드 채권 추심원들과 싸워야 합니다. 워런 교수는 <뉴욕 타임스>에 이 법안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칼럼을 싣습니다. 그 기사를 보고 당시 영부인이던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만나자고 연락을 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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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힐러리 클린턴을 만난 워런 교수는 파산법 수정안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 법안을 은밀히 미는 중이었어요. 주요 은행들이 로비를 하고 있었고, 클린턴 행정부는 민주당 정권이 재계와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거든요. 힐러리 여사는 그 '끔찍한 법안'이 통과될 경우, 파산 상태에 놓인 많은 이혼 여성들이 더욱 비참한 지경에 처할 것임을 알아봤어요. 그래서 가난한 엄마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법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남편을 설득합니다. 영부인으로서 제 역할을 한 거지요. 2000년 이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빌 클린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은행 로비스트들은 집요했어요. 클린턴은 퇴임했고, 신용카드 업계는 부시 대통령 후보 선거 캠프에 최대 헌금을 기부합니다. 2001년 봄 파산법 수정안이 새로 상정되었을 때, 초선 상원의원이 된 힐러리 클린턴은 그 법안에 찬성투표를 합니다. 자신이 '끔찍한 법안'이라고 부른 그 내용이 별로 달라진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부인 힐러리는 그 법안을 막자고 남편을 설득했어요.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말 레임덕이었고 장래 선거운동 기부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은 새로 시작한 정치 인생에서 든든한 재계의 자금 지원이 필요했어요. 파산 위기에 처한 가정들이 정치 후원금을 내지는 않잖아요? 상원의원 힐러리는 한 해에 은행업계에서 선거기부금으로 14만 달러를 받아 상원에서 두 번째로 많은 정치헌금을 받는 의원이 되었습니다. 거대 은행과 힐러리는 이제 한 편이 되었고, 그녀는 자신이 그 '끔찍한 법안'이라고 부른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 격차는 왜 갈수록 심해질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인을 움직일 힘이 없고, 부자들은 그 힘이 있으니까요. 가난한 사람이 백 원을 더 벌고자 하는 욕심보다, 부자가 천 원을 지키려고 하는 탐욕이 더 크니까요. 그 탐욕의 힘으로 1%를 위한 세상이 굴러가니까요.


정치인들이 재계 로비에 놀아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요? 정치인들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표지요. 그들에게 권력을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는 서민들의 투표.


지난 1년, 미국의 엘리트 정치인들은 진보며 보수 할 것 없이 유권자들에게 된통 당했습니다. 재계 로비에 휘둘리는 워싱턴 주류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가 선풍을 일으켰어요. '비싼 캠페인 필요 없다. 서민들의 한 푼 두 푼 모은 헌금으로 대선을 완주하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고 공언한 샌더스, '나는 부자라 기업들에게 돈을 구걸할 필요가 없다. 나야말로 미국 백인 중산층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트럼프. 샌더스와 트럼프 열풍 뒤에는 미국 주류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환멸이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을 보고 정치인의 모순을 깨닫게 된 엘리자베스 워런은 어떻게 했을까요? 본인이 스스로 나서야겠다고 결심하고 직접 미국 상원의원이 되었어요. 파산법을 강의하던 법대 교수가 직접 파산가정을 지키는 법의 수호자로 나선 것이지요.


어른들은 더 좋은 학군을 놓고 경쟁하고, 아이들은 더 좋은 학교를 놓고 경쟁합니다. 경쟁 속에 우리의 삶은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질문의 힘에 있습니다. "무상 보육, 어떻게 됐냐? 무상 급식, 왜 철회했냐? 반값 등록금 어찌됐냐?" 하나하나 따져 물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진 이유를 짚어봐야 합니다. 전세 폭등으로 지하철 난민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에 대해 정치의 책임을 따져야 합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거, 굳이 책이 아니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젊은 세대가 임신 출산 육아를 포기하는 건 그들이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출산 육아를 종용하기보다 아이를 키우기 더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을 만드는 게 우선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인센티브가 없는 일은 그 누구도 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표를 가진 유권자에게서 권력이 나옵니다. 그 권력의 무서움을 정치인들이 똑바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총선의 민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당이고 야당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다음 선거에서 다시 표로 응징해야지요. 그것이 우리네 사는 일이 조금이나마 덜 힘들어지는 길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