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질기고 독하고 당당하게

1년 전 겨울, 아이를 재우고 책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주룩 흘렀습니다. 글을 읽을수록 울음은 그치지 않고 오히려 흐느낌으로 바뀌었어요. 잠든 아이가 깰까 봐 혼자 숨죽여 울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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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습니다. 불타는 원자로에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소방관들입니다. 원전에 난 불은 껐지만, 그 불이 몸속으로 옮겨붙은 듯 그들은 장기가 녹아내려 죽습니다. 군인들도 소집되었습니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이동명령을 받았습니다. 방사능 누출 사고 수습에 나선 이들에게 영웅의 칭호가 주어졌으나 훗날 그들은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1986년의 체르노빌 사태를 보면서 저는 2012년의 MBC를 떠올렸습니다.

2012년 1월 언론노조 MBC지부 소속 조합원들은 공영방송 사수를 외치며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에 대해 총파업을 결의하고 싸움에 나섰습니다. 파업 때 가장 먼저 일어난 이들이 가장 먼저 해고되었습니다. MBC 뉴스의 공정성에 대해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부서가 가장 먼저 해체되었습니다. 파업 중 해고, 정직, 구속영장 청구, 등 숱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1,800명의 MBC 조합원들이 170일간 파업 대오를 지켰습니다.

한겨울에 시작한 파업은 한여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하고, 노조는 공영방송의 독립과 방송정상화를 약속하는 대선 후보들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현업에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철저히 배신당했습니다. MBC 노조는 가장 치열하게 싸운 대가로 가장 처절하게 망가졌습니다. 해고자 복직을 약속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후 복직은커녕 200여 명에 달하는 조합원에 대한 인사보복을 수수방관했습니다. 기자와 피디들은 취재 현장에서 쫓겨나 드라마 세트장으로, 스케이트장 관리부서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회사는 노동조합에 대해 195억에 달하는 업무방해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MBC 보도를 반성하는 입사 2년 차 예능 PD까지 해고했습니다.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회사가 저 지경이 되었는데. ‘왜 MBC를 나오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차마 할 말이 없어 고개만 떨굽니다.

체르노빌 사태 후, 방사능에 오염된 땅에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군인의 감시와 포위를 뚫고 몰래 숨어드는 사람도 있어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평생을 보낸 고향에서 죽겠다고. 사랑하는 가족이 묻힌 땅을 지키다 떠나겠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흘렀습니다. 조합을 박해하는 MBC 경영진의 임기가 방사능 물질의 반감기보다 길지는 않겠지요(우라늄의 경우 45억 년). 그렇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MBC를 지키자고 6개월 넘게 함께 싸운 동지들이 아직도 노동조합을 지키고 있습니다. 조합을 탈퇴하면 보직이 주어지고 승진이 뒤따르고 현업에 복귀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조합을 지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 달 전 11월 10일 그 조합원들이 MBC 사옥 앞에 모여 구호를 외쳤습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언론도 공범이다’ ‘청와대 방송 중단하고 책임자는 사퇴하라’. 구로며 수원이며 용인으로 뿔뿔이 흩어진 기자며 피디들이 한자리에 다시 모여 구호를 외쳤습니다. ‘4년 만에 다시 일어난 MBC 노동조합’이라는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지? 이제 분위기 바뀌니까 숟가락 얹으려고 슬슬 기어 나오는구나.

2012년, MBC 파업 집회에는 많은 시민들이 함께 했습니다. 장충체육관으로, 광화문 시청광장으로, 여의도 공원 노숙농성장으로, 추위를 이기고, 폭염을 견디고, 빗길을 뚫고 달려와 주신 분들이 많았어요. 집행부에서 누가 그랬어요.

이번에 꼭 이겨야 합니다. 우리를 응원하는 마음이 클수록, 싸움에 지면 배신감도 클 테니까요.

‘이제 너희는 필요 없다. 우리에겐 jTBC가 있으니까.’라는 댓글도 봤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이기지 못한 잘못인 걸 잘 압니다. 모두 우리 탓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저는 아직 MBC에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체르노빌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듯, 아직도 공중파의 역할을 믿고 치욕을 견디며 조직을 지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는 분이 몇 년 전 제게 물었습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 이탈자가 많습니다. MBC 노조가 6개월간 파업을 하면서도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은 비결은 무엇입니까?”

방송사 노조는 일의 특성상, 파업과 동시에 업무에서 빠지기가 어렵습니다. 당장 방송 송출을 담당하는 기술직 조합원도 있고, 드라마를 연출 중인 피디 조합원도 있습니다. ‘후배가 없는 동안에도 레귤러 프로그램의 경쟁력은 챙겨야 하니까, 내가 대신 일을 해야지.’ 하는 선배들도 있습니다. 파업이 길어지자 그들도 하나둘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집회 때마다 우리는 새로 동참한 조합원들의 이름을 부르고 박수를 쳤습니다. ‘뭐하다 이제 왔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하나 수를 불리고 세를 키우는 것이 질기게 싸우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12월 8일, KBS노조가 총파업 출정식을 올립니다. 싸움을 시작하는 그들을 부디 너그럽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뭐하다 이제 왔냐고 꾸짖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이미 충분히 부끄러우니까요. 함께 싸우려는 이들을 더 따뜻하게 맞아주시면, 길고 추운 겨울에도, 질기고 독하고 당당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염치없는 부탁을 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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