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저널리즘’

소위 청와대 국정논단 사건과 관련하여 문서유출 건으로 조사 받던 최 모 경위가 자살을 선택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강압이 있었는지 단순한 자괴감에서 비롯됐는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일보에 대한 원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채널 에이를 비롯한 몇 언론은 12월 14일 최 경위가 유서에서 ‘조선일보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즉각 그들이 ‘파악한 유서’ 내용과 다르다며, 일부 언론이 전체 맥락을 파악하지 않은 채 짜깁기로 조선일보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만약 유서에 최 경위의 배신감이라는 표현이 있으면 조선일보가 다른 언론사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성명이 발표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조선일보는 유서에 그런 표현이 있지만 자신들은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해왔다는 해명을 담은 재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14일 오후 6시 공개된 유서에 ‘<조선>에서 저를 문건 유출의 주범으로 몰고 가 너무 힘들게 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대응에 놀랐던 이유는 이게 저널리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서의 내용이나 두 번째 성명서로 볼 때, 조선일보가 ‘파악한 유서’ 내용에 근거했다는 첫 번째 성명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첫 번째 성명서는 조선일보의 부족한 취재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취재와 관계없이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게 소위 1등 신문을 자처하는 언론인 조선일보의 행태인가?

최 경위는 유서에서 ‘잃어버린 저널리즘’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는데 조선일보의 반응은 그 호소가 왜 필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지금 저널리즘 실종이 조선일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일부 언론을 제외한 우리 언론 대부분의 문제다. 누가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최 경위의 ‘잃어버린 저널리즘’이 가슴을 때리는 이유다.

저널리즘을 다루는 언론을 향해 ‘잃어버린 저널리즘’을 찾아 달라고 해야 하는 현실. 언론은 자신들을 향한 시민들의 이 절절한 호소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우리 사회는 수백 명의 목숨을 덧없이 보낸 세월호 대참사 속에서 우리 현주소를 직시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정파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움직이는 언론을 목도하고 또 다시 충격을 받았다. 70년대 언론화형식 이후 가장 충격적인 ‘기레기’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KBS에서는 비록 초록이 동색일지 모르지만 사장을 바꾸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뿐이다. 지금 우리 언론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세월호 대참사 보도를 반성했던 언론인은 외려 징계 당하거나 현장에서 밀려나고, 비난의 대상이었던 언론인은 승진했다. 대통령을 위해 편집, 왜곡 보도했던 언론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을 위해 움직인다. 최근에는 언론들이 국정농단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 비선 측근(?)의 국정 개입 의혹 사건을 문서유출 사건으로 비틀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저널리즘이 붕괴되면서 민주주의가 자기 조정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참여한 국제회의는 수십 분에 걸쳐 생중계되거나 편집되어 나간다. 그런데 주요 언론사 바로 옆에서 수십 일에 걸쳐 노숙 농성을 하는 C&M을 비롯한 케이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찾아 볼 수 없다. 아예 기자들의 취재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법적 정의에 기댔던 기대가 물거품이 된 쌍용차 해고 노동자 둘이 수십 미터의 굴뚝에 올라갔지만 시민들은 알 수 없다. 언론의 무시하기 때문이다. 코오롱 해고자 최일배 위원장이 40일이 넘는 단식 끝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입원하고도 단식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 또한 주요 언론에서 볼 수는 없다. 언론들에게 먹튀의 상징 기륭전자 노동자, 재능 노동자 등등은 단 1분의 시간도 내줄 수 없는 기사 가치가 없는 존재에 불과한 모양이다.

흔히 언론의 중립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외려 언론은 편파적이어야 한다. 소외된 약자에게 유리하도록 편파적이어야 한다. 왜냐면 사회는 이미 강자의 질서에 따라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사회구성원인 시민 각자가 동등해지기 위해서는 언론이 약자의 목소리를 더욱 반영해야 한다. 물론 현실은 반대다.

신은미·황선의 방북토크콘서트는 한 방송사의 종북콘서트 표현 이후 종북 논란을 넘어서지 못하고 백색테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누구의 표현대로 ‘기승전종북’이다. 종북콘서트라는 표현을 쓰는 언론사의 기자들 중 이 콘서트를 직접 가본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미 ‘사실이 곧 진실일 수 없’으니 사실 보도에 안주하지 말라는 저널리즘 상의 경고가 있지만 우리 언론에서는 아직 사실 보도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침공했고 이로 인해 수십만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경악스런 일이다. 하지만 더 경악스런 일은 언론이 이런 사실을 전쟁 전에는 보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디 미국의 이라크 침공만이겠는가. 우리 사회가, 우리 언론이 종북 프레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실을 외면할 때 예상되는 결과는 그 짐작만으로도 끔직하다.

언론인들이 정파적인 언론, 상업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언론 환경만을 탓하기에는 잃어버린 저널리즘의 상황은 심각하다. 언론인들의 깊은 자기 성찰과 행동이 필요한 시절이다.

최 경위는 자신이 왜곡된 저널리즘의 희생자가 되고 나서야 잃어버린 저널리즘의 심각성을 느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권력을 위해 춤추는, 강자를 위해 소외된 약자에 눈을 감는, 종북 프레임으로 기득권을 옹호하는 언론의 ‘잃어버린 저널리즘’의 심각성을 시민 각자가 피해자가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문제로 느낄 때는 이미 만시지탄의 상황이지 않을까? 시민의 각성 그리고 흔치 않지만 저널리즘의 기본을 잃지 않은 언론을 소비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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