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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노병의 마지막 편지

조현미 프로필 사진 조현미 2015년 06월 10일

기자

5월 28일 뉴스타파가 상이군경회 관련 보도(상이군인...가짜가 진짜를 울리다)를 내보낸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6.25 참전 용사를 시아버지로 둔 며느리 안은경(48) 씨의 전화였다. 안 씨는 시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안 씨의 시아버지 장한수(1930년생) 씨는 6.25 전쟁 참전 용사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이 안 된 1950년 7월 19일 학도병 1기로 입대했다. 강원도 양덕에서 연대장 함병선 대령의 호위병으로 전투를 벌이던 중 총격을 받아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당했다. 장 씨는 해군 함정 ‘온양호’를 타고 부산 경남여고에 마련돼 있던 제5 육군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마친 뒤에도 계속 군에 복무한 장 씨는 학력이 고졸 이상이란 이유로 장교로 발탁됐고, 1956년 5월 31일 만기 전역했다. 부상의 후유증으로 평생 약을 달고 살았던 장 씨는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안 씨의 얘기다.




시아버지께선 살아생전 어깨가 쑤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늘 보훈병원을 왔다 갔다 하셨고 집에는 약봉지가 수두룩했어요. 저와 큰 시누이는 항상 약 때문에 건강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약 봉지를 빼앗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2009년 5월, 장 씨는 복통을 호소하며 보훈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바로 입원했다. 당시 장 씨는 간경화로 인해 배에 복수가 찬 상태였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시아버지가 입원해 있던 중 안 씨는 잠시 친정집에 들렀다가 6.25 전쟁에 참전했던 동네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은 안 씨에게 호통을 쳤다.




시아버지가 전쟁에서 관통상을 당했다며, 자식들이 7급이라도 (상이등급을) 받아드려야 했던 것 아니야.



상이등급이라니,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다. 시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미리 찾아두려 방문한 시댁에서 어떤 서류 더미를 발견한 뒤에야 의문이 풀렸다. 그건 시아버지가 상이군인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한, 하지만 모두 기각된 서류였다. 족히 서너 번은 거절을 당한 것 같았다. 안 씨는 이 서류 더미를 시아버지에게 가져갔다.


“아버님, 이게 다 무슨 서류예요?”
“내가 6.25 전쟁에서 분명히 관통상을 당해서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는데, 보훈청이 계속 기각했어.”




▲ 2007년 의정부보훈지청이 장한수 씨에게 보낸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 반려 통보서 ▲ 2007년 의정부보훈지청이 장한수 씨에게 보낸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 반려 통보서

알고 보니 시아버지는 그동안 자식들도 모르게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위해 병무청이며 보훈청을 혼자 돌아다녔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혼자 관공서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시아버지 모습을 상상하니 기가 막혔다. 안 씨는 그 날부터 시아버지의 주민등록증 하나만 들고 관공서를 찾아다녔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아버지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왜 유공자 신청이 번번이 기각됐는지도 알고 싶었다.


병무청 직원은 하루라도 빨리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알려줬다. 시아버지가 참전 중에 당한 부상을 치료한 기록, 병상일지도 꼭 찾아야 했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 참전 중 당한 부상으로 상이등급을 받으려면 치료기록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아버지가 유공자가 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병상 기록이 없었기 때문임을 알게 됐다. 국가보훈처가 2007년 6월 장 씨에게 보낸 ‘국가유공자 요건 재심의 반송’ 공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본인 진술 외에 병상일지 등 전상 관련 객관적 거증(증명) 자료가 없어 전상을 불인정한다.”


일반적으로 상이용사가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면 보훈처는 국방부에 병상일지 등 자료를 요청한다. 그런데 국방부는 번번이 ‘장한수’라는 이름의 병상일지를 찾을 수 없다고 알려왔다. 대체 장 씨의 병상 기록은 어디로 간 걸까.


안 씨는 켜켜이 쌓인 서류뭉치를 보던 중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문제는 군번이었다. 과거 군 행정상의 착오 때문에 시아버지의 군번이 두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확인한 뒤 안 씨는 국방부에 다시 병상일지 확인을 요청했다. 군번이 두 개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 6.25 참전 용사 장한수 씨가 생전에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하기 위해 의정부 보훈지청장에게 쓴 편지 ▲ 6.25 참전 용사 장한수 씨가 생전에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하기 위해 의정부 보훈지청장에게 쓴 편지

2009년 6월 17일, 국방부의 한 사무관에게서 급하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시아버지의 병상일지를 찾았다고 했다. 병상일지에 시아버지의 두 번째 군번과 함께 ‘장한수’가 아닌 ‘장원수’란 이름이 기재돼 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결국, 병상 일지 상의 이름이 달라 그동안 번번이 기록을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반가우면서도 허탈했다.


다음 날 저녁, 안 씨는 시아버지에게 병상일지를 보여드렸다. 상태가 악화돼 있던 시아버지는 “잘했다”며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안 씨는 당장 보훈병원 의사에게 시아버지의 신체검사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의사는 자신의 환자가 아니라며 신체검사를 해 주지 않았다.


2009년 6월 19일, 안 씨는 의사를 볼 때마다 “아버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다”며 신체검사를 재촉했다. 그러나 보훈병원 의사는 “당장 돌아가실 일은 없다. 다음 주 월요일쯤 하겠다”고 한가한 소리만 늘어놨다. 그러나 그 날 오후 장 씨는 한 차례 각혈을 한 뒤 위중한 상태에 빠졌다. 겨우 몸을 일으켜 요구르트 하나를 마신 뒤였다.


안 씨는 의사에게 인공호흡기를 끼우고라도 신체검사를 해 달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보훈병원 측은 남는 호흡기가 없다고 했다. 의사 세 명이 돌아가며 수동으로 인공호흡을 시키며 신체검사가 진행됐다. 장 씨는 신체검사가 끝나고 한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마친 뒤 안 씨는 시아버지를 대신해 보훈처에 다시 국가유공자 신청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7~8개월이 흐른 후에야 가장 낮은 등급인 7급을 받았다. 보훈처는 유가족에게 장 씨의 한 달 치 보상금 30만9천 원(2010년 1월 기준. 현 38만4천 원)과 124만4천 원의 사망일시금(2010년 1월 기준. 현 144만4천 원)을 보내왔다. 유가족에 대한 보상금은 없었다. 유가족 보상 대상이 되기 위해선 당사자가 6급 이상의 등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6.25 참전 용사로 관통상을 입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장 씨는 결국 숨진 뒤에, 그것도 며느리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상이등급을 인정받고 국가유공자가 됐다.


지금 안 씨 가족에게 남은 건 뭘까.


시아버지의 병상 기록을 찾으러 다니는 동안 안 씨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모든 신경을 시아버지 문제에 쓰는 바람에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아들에게까지 소홀했다는 것이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 고3이던 안 씨의 아들은 엄마에게 화를 냈다. 엄마는 요즘 뭐 하는 사람이냐고. 안 씨는 “그때는 섭섭해서 울면서 병원으로 갔는데 지금도 아들에게 신경을 못 썼던 것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안 씨는 당부라며 이런 말을 남겼다.




6.25 참전 군인 미망인들도 대부분 80세가 넘으셨고 전국에 몇 분 안 남으셨을 텐데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보훈병원만 이용할 수 있는 건 문제인 것 같아요. 사시는 곳에 있는 병원을 이용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지 정부에 꼭 물어봐 주세요.



고 장한수 씨는 그나마 며느리의 도움으로 세상을 등진 이후였지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어딘가엔 제2, 제3의 장한수 씨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을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국가보훈처와 대한민국상이군경회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장 씨와 같은 피해자를 찾아서 제대로 돕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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