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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2015년 08월 21일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 칼럼니스트
역시 박정희는 힘이 세다. 7일 한국갤럽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전국 성인남녀 2,003명을 대상으로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4%가 박정희를 꼽았는데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24%)과 김대중 전 대통령(14%)을 합한 것보다 높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을 '박정희의 나라'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결과를 더 살펴보면 박정희는 잘한 일이 잘못한 일보다 무려 4배 이상 높은데 잘한 일 가운데 으뜸은 경제발전이다. (역대 대통령 선호도 1위 박정희…2위는 노무현-한겨레신문)
단도직입으로 묻자. 반신반인(?) 박정희 덕분에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경이적 경제성장이 가능했는가? 아니다. 아니다. 세 번 아니다.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비약적 경제성장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은 영웅사관(영웅이 역사를 이끈다) 혹은 자학사관(불세출의 리더 없이 민중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에 불과하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에 최적의 대내외적 조건 속에서 재임 기간을 보냈다. 대외적으로 보면 미국과 유럽을 양축으로 하는 서구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미국의 군사적 보호 및 경제적 지원 속에서 국제 분업체제의 하위파트너 지위를 안정적으로 인정받았다. 즉 대외수출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려 한 대한민국에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구매자들이 즐비했다.
후발국가로서의 다양한 이점도 컸다. 어느 나라나 할 것 없이 경제 발전 초기에는 대단히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한다. 이는 마치 30점을 맞던 학생이 50점으로 끌어올리기는 쉬운 것과 같은 이치다. 후후발국가는 선발국가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면서 선발국가들이 이룬 제도적, 산업적, 과학기술적 성과들을 큰 비용 없이 흡수할 수 있다. 박정희가 다스리던 시절은 대한민국이 후발국가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누리던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대내적 조건도 경제성장에 최적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단행한 선진적 농지개혁으로 인해 산업화의 최대 걸림돌인 지주 계급이 사실상 소멸했고, 그로 인해 구성원들 간의 평등한 사회경제적 출발이 가능해졌다. 또한, 교육 수준이 높고 근면한 대규모 노동력이 존재했으며, 수백 년에 걸쳐 구축된 수준 높은 문화적, 조직적 자원들이 건재했다. 아울러 정부의 정책 결정과 집행을 조직적으로 방해할 만한 세력이 부재했다. 쉽게 말해 박정희는 사실상 백지상태에서 양질의 질료를 가지고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운 좋은 화가였다. 민주정부의 지도자들은 이미 고착된 경로와 강력한 정치적 반대자들로 인해 자신이 지닌 비전과 포부를 펼치는 데 비상한 곤란을 겪는다.
흔히 간과되곤 하지만 박정희에겐 87년 이후 대통령들보다 결정적으로 유리한 이점이 있었다. 18년에 걸친 장기집권이 그것이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하면서 시행착오를 만회할 기회를 얻었고, 긴 호흡으로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중단 없이 이를 추진할 집행력을 담보할 수 있었다. 5년 단임의, 그것도 대내외적 조건이 박정희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리한, 대통령과 박정희의 경제적 치적을 비교하는 건 그 자체로 부당하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 조건들을 감안할 때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기적이 아니었고 박정희 개인의 역량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대한민국을 접수할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성장에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출발선을 힘차게 박차고 나갈 참이었다. 경제성장률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박정희가 아닌 누가 집권을 했더라도 박정희 재임 시에 이룬 성취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경제성장을 이뤘을 가능성이 컸다.
더구나 박정희 통치 기간 중의 경제적 성과들은 치명적인 약점들을 내장한 채 달성된 것이었다. 고지가(高地價)와 고물가라는 정책수단을 이용한 외상경제의 채택, 노동 및 농업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과 배제, 재벌 및 수도권ㆍ경상도 중심으로 경제체제를 재편해 기업 간, 지역 간, 산업 간 극단적인 불균형 초래 같은 것들이 박정희 경제체제의 그림자였다. 문제는 박정희식 경제 체제가 지닌 모순들이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 경제ㆍ사회적 모순들은 기실 박정희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요컨대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최적의 대내외적 조건들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지속가능하고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편익을 누릴 수 있는 경제모델을 만드는 데 철저히 실패한 것이다.
박정희의 가장 큰 잘못은 쿠데타를 통한 헌정 유린도,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경제체제 구축도, 민주주의의 압살도, 정보정치와 공포정치도 아니다. 박정희의 최대 과오는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을 병들게 하고 노예화한 데 있다. 박정희는 18년에 이르는 장기 집권 기간 동안 대한민국을 병영으로, 국민을 병사로 간주하고 인간개조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추진했다. 박정희의 인간개조 프로젝트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정신보다는 물질에, 과정보다는 결과에 집착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물신숭배자ㆍ경제동물ㆍ우승열패의 신도들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생존 욕구와 약육강식이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물질적 풍요와 힘만을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윤리, 정의, 진실, 타인을 위한 헌신과 희생 같은 덕목들은 휴지통에 버려진 지 오래다.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박정희가 남긴 정신의 유산들은-제도적, 물질적 유산들은 물론이거니와-사라질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추구했던 가치와 지향은 퇴영적이고 폐해가 너무나 크다. 무엇보다 박정희 정신 안에는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존엄성이 없다. 박정희 정신에 대한 승인은 우리가 단지 소비의 기계, 생식의 기계가 되는데 머물겠다는 선언이다. 박정희 정신에 대한 승인은 인간 세상이 정글이며,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마음대로 하는 게 당연하다는 선언이다.
박정희가 한국인들의 정신과 가치와 지향에 지대한 영향력을 지속해서 행사하는 한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선진국이 되기는 불가능하다. 박정희는 박근혜의 실패와 함께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박정희와 헤어져야 대한민국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