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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한 것만 물어봅니까?" - 촬영기자의 세월호 청문회 후기

김수영 프로필 사진 김수영 2015년 12월 21일

촬영기자. 가까이 다가가면 크게 보이고, 한발 멀어지면 작아 보인다. 세상일도 그렇다.

지난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동안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1차 청문회가 열렸다. 참사 이후 600여 일 만에 이루어진 청문회다. 청문회를 열기까지 가족들의 노력을 떠올려보면,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청문회가 감격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여당측 위원 5명이 전부 불참했지만, YWCA에서 열린 청문회는 언딘을 제외한 대부분의 증인이 출석해 예정대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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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한상균 때와는 180도 달랐던 방송사들


청문회 일주일 전, 조계사에서 수많은 기자들과 진을 치며 촬영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날의 취재 열기는 한산했다.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수배된 한상균 위원장의 동선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커다란 지미집, 경찰과 기자들이 가득 메운 조계사 안팎에 설치된 종편의 생방송 부스와 공중파의 중계 차량을 보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하고 갸웃했던 일이 떠올랐다.


진상 규명을 위해 공개적으로 마련한 세월호 청문회 자리를 어느 공중파도 중계하지 않다니. 한상균 위원장의 자진출두보다 훨씬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이 뉴스가 대부분의 언론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도대체 왜?’하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청문회는 우리의 언론 현실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시작됐다.


참사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해경, 사고 책임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라 내심 순진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행여 누군가 양심적인 폭로로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새로운 물꼬를 트지 않을까. 3일 동안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청문회 과정 중에 확인된 몇 가지 추가적인 사실들은, 녹취록과 증거물을 들이대며 여러 번 따져 묻는 위원들 앞에서 증인들이 증언을 번복하거나 중언부언하는 사이에서 미미하게 드러났을 뿐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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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당시, 책임자들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증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들은 “아무것도 안한 거죠?”라고 묻는 특조위 위원들의 말에 “그렇게 말씀하면 안 되죠!”라고 발끈했다. 그들의 말은, 구조 활동은 미처 하지 못했지만, 다들 각자 다른 일을 하느라 경황이 없었다는 것이다. 촉각을 다투는 위급한 시간에 조형곤 목포해경 상황담당관은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유연식 서해청 상황담당관은 ‘당시 이런저런 많은 업무’를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각자 바쁜 일을 처리하는 동안,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책임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날의 행적을 제대로 보고하지도 않았다. 국회, 검찰, 감사원에 해경 간에 교신한 TRS(주파수공용통신) 녹취록을 제출할 때, 내용 일부를 삭제해서 여러 판본을 만들었다는 게 청문회에서 확인됐다. 분명히 통화기록과 데이터 통신기록이 있는데도 김경일 123정장은 휴대폰을 쓴 일이 없다고 잡아뗐다. 김석균 해경청장은 자신의 부서에서 나온 보고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김문홍 목포해양경찰서장은 상식적인 구조 지휘에 관해 물었는데도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장관부터 청장까지 이런 태도로 임하고 있으니, 여기서 누구라도 “내가 잘못된 판단으로 행동했다.”고 인정하는 순간 ‘독박’을 쓸 것 같은 분위기였다. 결국 책임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김경일 123정 정장을 구속하는 수순에서 매듭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아니, 그렇게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


모두 최선을 다하고, 모두 각자 할 일을 했는데, 왜 세월호에서 300여 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는지, 가라앉는 배가 생중계 되는 상황에서 아무도 아이들을 구조하지 못했는지 이 모든 것이 미스터리가 되어버렸다. 유가족이 아닌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진실을 알고 싶다’고, ‘진상규명이 안전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된다’고 외치는 유가족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진상을 알아야 책임자를 징계하고,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비를 할 텐데, 철저하게 담합한 듯한 모르쇠 증언은 세월호 참사를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 벌어져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이었다는 궤변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세월호 특조위가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조직이어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 증인들은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데 의지가 없음을 스스럼 없이 드러냈다. 내내 모른다고 잡아 떼던 문서에 자신의 도장이 찍혀있는 걸 보자, 유연식 상황담당관은 이렇게 말했다.




도장을 찍은 기억은 없지만, 제 도장이 찍혀 있다면 제가 찍은 거겠죠.



당시 350명을 구조했다는 잘못된 상황보고서를 작성했던 상황실장을 징계했냐는 질문에, 종합상황실 책임자였던 우예종 증인은 “징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직함을 거론하며 그가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여전히 같은 4급 과장급으로 일하고 있지 않냐고 되묻자, "징계 받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한 것 같다' ‘~한 줄 알았다'며 남 일인듯 말하고, 추궁하면 ‘잘 모르겠다. 확인해보겠다'고 말하는 화법은 증인들이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았다.


책임자들은 "배가 그렇게 넘어갈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고…", "아무도 탈출 지시를 하지 않을 줄 전혀 생각 못했고…", "선원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재일 것"이라고 믿었고, 누군가 "세월호와 교신하고 있을 줄로" 믿었다. 책임자 위치에 걸맞지 않은 무한 믿음과 협소한 상상력으로 그 급박한 상황에서 모두들 ‘그런 줄로 알고만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직접 상황을 확인하거나 구조 행위를 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확인됐다.



제가 한 일도 있는데, 왜 안한 일만 물어봅니까?


▲ 오른쪽이 김문홍 당시 목포경찰서장. 3일 동안 질의 내내 “나는 할 것을 다했다"고 외치던 김문홍 증인은 지금 국민안전처 과장으로 있다. ▲ 오른쪽이 김문홍 당시 목포경찰서장. 3일 동안 질의 내내 “나는 할 것을 다했다"고 외치던 김문홍 증인은 지금 국민안전처 과장으로 있다.

증인들이 답변하는 데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었다. 이주영 장관은 사과부터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사고 이후에도 여전히 국회의원 신분이고, 장차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이주영 장관은 “어쨌든 죄송하다"며 다분히 분위기를 의식한 면피성 사과만 거듭했다. 김수현 서해청장은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했다. 어느 평범한 날의 9시 30분을 물어본 게 아닌데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평생의 오점으로 실패로 남을 그 날의 일을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3일 내내 출석했지만, 위원들과 전혀 질의 응답이 진행되지 않는 자도 있었다. 무엇을 질문해도 자기가 준비한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하는 사람. 되려 질문하는 위원들에게 언성을 높이고 발끈해, 입만 열면 장내의 귀를 사로잡은 사람, 바로 목포해양경찰서 김문홍 서장이다. 그는 사고 내용을 접수하고 “빨리 달려가 구조하라"는 명령은 했지만, 명령이 어떻게 이행됐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세월호와 멀리 떨어져 있어 교신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떳떳하게 증언했다.


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올 정도”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그 이상은 서장의 역할이 아니”라고 말했다. 두 답변의 괴리를 어떻게 납득해야 할까. 이 사람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는 게 사실일지 모르겠으나, 김문홍 서장은 대단한 자기 확신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3일 동안 반복한 그의 완고한 증언은 자기 최면에 가까웠다. 상황 보고를 들었으면서 왜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느냐고, 왜 더 적극적인 구조 활동을 하지 않았느냐고 재차 묻는 위원에게 그는 소리 질렀다.




위원님은 왜 제가 안한 것만 이야기합니까? 제가 한 일도 있는데! 도대체 제 입에서 무슨 말을 듣고 싶습니까?



충격과 공포였다. 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때 저는 할 것 다했습니다!



생존자들의 고통


▲ 왼쪽이 참고인으로 참석한 세월호 생존자 최재영 씨, 오른쪽이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몸에 상처를 내고 응급차에 실려간 김동수 씨다. ▲ 왼쪽이 참고인으로 참석한 세월호 생존자 최재영 씨, 오른쪽이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몸에 상처를 내고 응급차에 실려간 김동수 씨다.

3일의 청문회를 통해, 그날의 사고를 수습했던 책임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대단히 비극적인 일이었다. 뉴스에 공공연히 등장하는 의인이, 선행을 베풀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 거기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투철한 직업 의식을 가진 공무원 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하필 왜 이런 사람들만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것일까? 재난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파악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 이것이 비극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600일이 넘었다.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뉴스를 쫓아다니느라 세월호 참사의 충격과 상처가 내 삶에서 멀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방청객에 앉은 유가족들, 배에 탔던 생존자들의 상처는 여전하고, 사고 당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무책임 역시 사고가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였다. 청문회 첫날, 참고인으로 참석했던 생존자 화물기사 최재영 씨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막 청문회가 시작됐고, 증인으로 출석한 이춘재, 유연식, 조형곤 증인의 입으로 모든 카메라가 향해 있을 때였다.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최재영 씨는 내내 멍한 표정으로 참고인석에 앉아있었다. 증인들이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같은 발언을 할 때마다 최재영 씨는 손수건으로 계속 눈가를 훔쳤다. 슬픔도 애통함도 아닌, 조금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다. “제가 나올 때 뒤에 여학생 셋과 남학생…” 학생들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날의 상황이 떠오르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배 안에서 입었다는 화상보다 더한 고통이 그에게 있었다.


박상욱 123 승조원은 세월호에 다가간 123 구조정이 선장을 구조했을 때, 바로 구조정에 옮겨타지 않고 세월호에 남아있었다. 이를 확인한 위원들이 “왜 세월호에 남았느냐고, 혹시 배 안에서 급박하게 처리할 일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추궁하자 박상욱 증인은 이렇게 답했다. “123정이 조류에 휩쓸린 것 같습니다” 그때 방청석 쪽에서 벌떡 일어나 “위증입니다!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하고 외치며 벌떡 일어난 이도, 유가족이 아니라 세월호 생존자였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제 몸에 상처를 낸 그 사람이 바로 ‘세월호 의인’으로 불렸던 김동수 씨였다는 것이 나는 충격이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아픔과 또 다른, 말로도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거기에 있었다. 생존자들은 증인들의 불성실한 답변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알렸다.



참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셋째날 이주영 전장관의 증인심문이 끝나자, 방청석에 있던 민간인 잠수사 김관홍씨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 자리가 아니면 물어볼 수가 없다”며 이주영 증인에게 질문 하나를 꼭 하고 싶다고 특조위에 간곡히 요청했다. ▲ 셋째날 이주영 전장관의 증인심문이 끝나자, 방청석에 있던 민간인 잠수사 김관홍씨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 자리가 아니면 물어볼 수가 없다”며 이주영 증인에게 질문 하나를 꼭 하고 싶다고 특조위에 간곡히 요청했다.

철벽 같은 답변을 늘어놓던 김문홍 당시 서장은 현재 국민안전처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구조 당시 500명 잠수부가 투입되었다는 게 거짓인 줄 알았지만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이주영 당시 장관은 지금도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으로 일하고 있다. 우예종 당시 사고수습 총괄팀장은 부산 항만공사 사장이다. 아직도 그때 그 사람들이 공무를 수행 중이다.


셋째날, 이주영 장관의 심문이 끝날 즈음, 방청석에 앉아있던 민간 잠수사가 일어나 외쳤다. 장관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7월 9일, 그동안 수고했고 나가달라는 문자 한통으로, 그 어떤 얘기도 듣지 못하고 10일 날 쫓겨났다"고 그에 대한 장관의 의견을 물었다. 잠수사에게 형, 동생 하고 지내자던 장관은 이렇게 간단히 답했다. “진도 상황이 더디고, 작업 난이도가 높아지는 상황이라 업체를 바꾸는 게 좋겠다는 판단”으로 그랬다고 답했다. 세월호 현장에서 비정규직은 또 이렇게 잘렸다.


정작 제 자리에서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은 국가와 정부에게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내쫓겼다. 이날 들려온 얘기들이 나는 도무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청문회는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가 총체적으로 드러난 현장이었다. 그래서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내가 정말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