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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사태 속에서 감행되는 후진적 정치 행태들

강병국 프로필 사진 강병국 2015년 07월 01일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경향신문 기자와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노조활동이 계기가 되어 뒤늦게 법률을 공부했다. 원래 관심사는 문학이었지만 직업생활을 하면서 언론과 노동 등으로 관심분야가 넓어졌다. 의무를 다하는 것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메르스 정국이 계속되고 있다. 한 달 반 동안 거의 모든 정치ㆍ사회적 현안이 메르스로 뒤덮여 버린 모습이다. 총리 후보자 인준절차가 의혹 규명 없이 봉합되었고,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행사가 여당 원내 대표의 진퇴를 묻는 형국으로 괴이한 변질과정을 밟고 있다.


메르스 사태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수준을 드러낸 제2의 세월호 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의 방역체계와 전염병 발생 시의 초기대응능력, 병원 응급실의 감염 방지 수준 등 국민 보건을 위한 기초가 갖춰져 있지 않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세계보건기구 합동조사단도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메르스 확산 원인으로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는 의사 쇼핑 관행과 응급실 과밀화 및 지인들이 환자를 방문하는 문화, 메르스에 대한 의료진의 정보 부족 등을 지적했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정부의 무능함을 드러낸 사건이자 국가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게 만드는 사건이다.


메르스 사태는 압축성장으로 선진국 문턱에 이르렀다는 우리의 진짜 실력과 속살을 발가벗겼다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사실 벼락치기 성장에 내실을 갖출 기회는 없었다. 선진국들이 대체로 몇백 년 걸려 이룩한 사회 인프라를 무슨 수로 수십 년 만에 구축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 대목에서 솔직해져야 한다. 지난 6월 29일이 삼풍백화점 붕괴 20년이 된 날인데,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삼풍백화점 붕괴가 그 구조 측면에서 닮은꼴이라는 분석이 왜 나왔겠는가?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가 이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언감생심임을 우리는 모두 알지 않는가. 우리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지 내년이면 20년이 되지만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멀고도 험준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벼락치기로 쌓아올린 사상누각의 기초 보강 작업에 매진해야 할 때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작업에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결코 밑질 게 없다는 식의 투철한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움직이고 있다. 메르스 정국을 틈타 총리 인준절차가 얼렁뚱땅 처리되었다. 메르스 공포가 없었더라면 과연 총리 인준안이 무사히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겠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대통령이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 국회는 재의에 붙이게 되어 있는 헌법상의 명백한 절차가 왜 논란의 대상이 되는가. 여당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국회에 되돌아온 법률안에 대하여 재의 절차를 밟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헌법 제53조에 반하는 위헌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메르스 창궐의 원인이 보건의료 체계의 후진성에서 비롯된 것임이 매일 확인되는 상황에서조차 헌법을 무시하는 후진국형 정국 운영을 감행하는 만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행사가 여당 원내대표에 대한 무조건적 비토로 변질되어 버린 현재의 정국은 초헌법적이고, 민주정치의 모습이 아니다.


현 정국의 뇌관이 된 국회법 개정안이란 대통령령이나 부령 등 행정입법이 법률의 취지 또는 내용과 합치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경우 국회 상임위원회가 소관 중앙행정기관의 장에게 그 내용을 통보할 수 있는 현행법을 고쳐 수정ㆍ변경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법률의 하위 법령인 대통령령 등이 법률을 위반해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위반 여부를 국회 상임위원회가 판단하는 부분 외에는 사실 당연한 규정이다. 또한, 위반 여부를 국회 상임위원회가 판단하는 부분은 현행법상 이미 존재하는 규정이므로 개정된 부분인 상임위원회의 요청이 구속력만 갖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기 어려운 법률안이다. 일단 법률로 공포한 뒤 실제 운용과정에서 위헌성이 드러나면 그때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해도 늦지 않다.


사실 한국법제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12개 분야 814개 법률을 헌법재판소의 위헌심사 기준에 따라 분석해 본 결과 447개 조항에 위헌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위헌성이 의심되는 법률 조항은 상당히 많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거부권행사도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고, 이에 대응하는 여당의 입장도 제정신을 차리고 정한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가 우리뿐이라는 자부심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동력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위해 벼락치기 성장 과정에서 생긴 나라의 기초적 부실을 메우는 작업에 힘을 모아야 한다. 메르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과 전혀 무관한 일에 국력을 소모하는 것은 골든 타임을 허비하여 선진국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