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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새로 나라를 만든다는 각오가 필요한 때

강병국 프로필 사진 강병국 2016년 12월 30일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경향신문 기자와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노조활동이 계기가 되어 뒤늦게 법률을 공부했다. 원래 관심사는 문학이었지만 직업생활을 하면서 언론과 노동 등으로 관심분야가 넓어졌다. 의무를 다하는 것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나라의 앞날이 불안하고 위태롭다.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 지도층의 무책임과 몰염치가 나라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탄핵 사태로 인한 국격의 실추와 국정 혼선이 민주주의를 내실화하는 정치발전의 성장통이 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사회 지도층의 책임의식과 사명감, 공익에의 헌신 등 민주정치의 윤리적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한 원인에는 개인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보좌진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아픈 개인사가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를 초래한 배경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보다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청와대의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등이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것이 더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헌법 제86조와 제87조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대통령 보좌 의무를, 정부조직법 제14조는 대통령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의 대통령 보좌 의무를 각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헌법과 법률에 따라 대통령을 보좌할 의무가 부여된 이들 공직자가 헌법과 법률상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 것이 이번 탄핵 사태의 가까운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공직자윤리법 제2조는 「국가는 공직자가 공직에 헌신할 수 있도록 공직자의 생활을 보장하고」라고 규정하여 공직자에게 생활보장을 해주는 대가로 공직에의 헌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공직자가 최순실을 알고 지냈다면 그것은 이들이 최순실이라는 비선의 국정농단 사태에 직ㆍ간접적으로 관여하였거나 최소한 방조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만약 이들이 최순실을 모르고 지냈다면 공직에의 헌신의무와 대통령 보좌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점에서 직무유기 또는 직무태만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최순실의 측근으로 활약해 온 차은택, 고영태 등의 청문회 증언으로 재확인된 바와 같이 최순실이 장ㆍ차관이나 수석비서관 등의 인사를 추천하거나 낙점하는 것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대통령의 보좌진들이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김기춘 비서실장은 인사위원장을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정부 인사안을 점검하는 위치에 있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2014. 7. 7.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안대희, 문창극 총리 내정자가 연이어 낙마하는 등의 인사검증 실패에 대하여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인사위원장인 자신에게 있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새롭게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문화예술계 인사에 대한 블랙리스트도 1만여 명에 이르는 리스트의 내용상 청와대나 문체부가 관여하지 않고서는 작성될 수 없는 문건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국정농단 사례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들이 근무시간에 학문과 예술의 자유라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리스트를 만들고 있었으니 공무원 조직이 범죄에 동원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좀 더 시각을 넓혀보면 대통령 탄핵 사태에는 대통령, 공직자들 외에 비선실세 최순실을 통해 이권이나 공직을 차지하려는 지식인들의 검은 욕심이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한 증인들은 한결같이 부인하였지만, 이대 총장과 교수들의 정유라에 대한 특혜입학과 정부연구과제 수주, 김영재 성형외과 의사의 대통령에 대한 비공식 의료시술과 서울대병원 외래교수 겸직ㆍ성형수술용 실에 관한 정부의 연구개발비 지원 등이 짬짜미와 대가관계로 이루어졌을 공산이 크다. 대학의 총장과 교수, 의사, 서울대병원장, 고위공직자 등 이른바 우리 사회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배반하여 사리사욕을 꾀한 것이 이번 탄핵 사태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격동의 한 해를 보내며 후대의 역사가는 2016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궁금하다. 청문회에 출석한 공직자를 비롯한 증인들이 대부분 모르쇠와 발뺌으로 일관한 이유는 친일 청산의 실패, 진실 규명 능력의 부족, 반민주 사범에 대한 부실한 단죄 등 우리 사회의 원초적 약점을 틈탄 것이라고 본다. 청문회의 증인들은 죄수의 딜레마에 함축된 나름대로의 논리적 셈법에 기초하여 모르쇠와 발뺌이 자신에게 최선의 방어책이 되리라 판단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서구에서 오랫동안의 역사적 시행착오를 거쳐 그 결실로 고안해 낸 묵비권, 무죄추정원칙, 구속이나 압수ㆍ수색의 영장주의, 국정조사 시 증인소환 방식 등 민주적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출산의 고통을 생략한 졸속성 때문에 법제도의 톱니바퀴가 헛도는 상황을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국정조사 청문회에서도 증인으로 채택된 자가 출석요구서 받기를 회피하면 출석 의무가 생기지 않고, 동행명령장도 소재를 감춘 증인에게는 무력하게 되는 등의 제도상 허점이 노출되었다. 최첨단의 기상예보용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고서도 수슈퍼컴이 생산하는 데이터를 판독할 능력이 모자라 일본과 미군의 기상예보 정확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예가 될 것 같다.


한 해를 마감하며 새삼 송구영신의 뜻을 되새겨본다. 사전에는 송구영신이란 말의 유래가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단순히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 외에 송구영신이 가진 원래의 의미가 실현될 새해에는, 대한민국이 진짜 새롭게 태어나는 획기적 전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